느슨해진다는 것/ 이정록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뒷간에 기대 놓았던 대빗자루를 타고 박 덩굴이 올라갔데. 병이라는 거, 몸 안에서 하늘 쪽으로 저렇듯 덩굴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데. 마루기둥에 기대어 박꽃의 시든 입술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추녀 밑으로 거미줄이 보이는 게야. 링거처럼 빗방울 떨어지는 거미줄을 보고 있자니, 병을 다스린다는 거, 저 거미줄처럼 느슨해져야 하는구나.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거미처럼 때로는 푹 쉬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데. 달포 가까이 제 할 일 놓고 있는 빗자루를, 그래 너 잘 만났다 싶어 부둥켜안은 박 덩굴처럼, 내 몸에도 새로이 핏줄이 돌지 않겠나. 문병하는 박꽃의 작은 잎술을 바라보다가, 나 깊은 잠에 들었었네 그려.
비가 오니 마누라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먼.
부침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말이여.
참 자네 안사람이랑 애들은 다 잘 있는감.
그리고 말이여, 제수씨 밀가루 다루는 솜씨는 여전헌가.
- 시집 <제비꽃 여인숙>(민음사,2001)
바삐 살 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아주 낮고 어둡거나 습하고 비좁은 틈새에 주로 거처한다. 무심하게 꼼지락대면서 녹슬듯 체념하듯, 그러나 들숨 날숨 반짝이며...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과 날벌레의 박제, 아스팔트 틈새의 풀꽃, 창고 각진 모서리의 곰팡이, 담벼락 가로질러 질주하다 마주친 생쥐의 초롱한 눈동자. 난은 시들어 뽑혀버리고 모양으로 얹혀져 손톱만큼 살아있는 푸른 이끼...
병원에서 퇴원한 뒤 햇볕에 눈부셔하며 구부정한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길 때, 정년퇴임한 노교수의 돋보기 넘어로, 글레에서 벗어난 50대 가장의 산보 가운데, 헨델의 라르고 시디를 천천히 밀어넣을 때, 세상의 시계가 참 느리다고 생각했으나 그 하루는 휙 지나갈 때, 안보이는 것들이 보이고 부침개 생각도 난다.
실제로 그 부침개 안주 삼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불러 막걸리를 들이킬 때 장독대에선 장이 익어가고 제비는 집을 짓는다. 그런 가운데 가랑비가 땅을 적시는 날이면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비를 피하는 달팽이의 걸음에서, 봄의 들녘에서 쟁기를 끄는 소의 우직한 걸음에서 문득 '느슨함'의 미학을 깨친다. 그리고 문학 특히 시의 경우는 대체로 그런 자잘하고 눈에 잘 뛰지 않은 것들을 재료로 하니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 느슨해지지 않으면 유통되지 않는 상품이란 사실도 환기한다.
* 언제부터인가 입에 발린 말로 번졌던 삶의 방식으로서의 '느림의 미학'이 여러 형태로 생활에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공해 없는 자연환경 속에서 고유의 먹을거리와 문화를 향유하며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 ‘슬로우 시티(Slow City)’운동인데 관광자원화하여 결국은 번잡함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든가,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을 노리는 경향도 없지 않더라.
바쁜 도시생활과 반대되는 개념인 슬로우시티 운동은 이탈리아의 한 소도시가 진원지라고 한다. 1999년 당시 그 도시의 시장이 “빨리 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라고 주장하며 마을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 시작됐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반성하고 획일적이며 대량생산된 문명의 이기를 떠나 느긋하게 사는 법을 실천할 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곧장 호응을 얻으면서 유럽으로 퍼져 갔고 아시아에선 최초로 전라남도 담양, 장흥, 완도, 신안 등 4개 군이 맨 먼저 슬로우 시티로 지정됐다.
이어서 경남 하동과 충남 예산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물론 몇 가지 요건이 있고 연맹의 실사도 받아야 한다. 우선 인구가 5만 이하여야 하고 차량통행을 최소화하면서 자전거 도로가 있어야 한다. 글로벌 브랜드의 대형 체인점과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와서도 안되고 실외 자판기도 최소화해야 한다. 마을 주변엔 나무가 충분히 식재되어야 하고 네온사인도 없애야 한다. 무엇보다 전통 수공업과 전통 조리법이 장려되는 분위기 속에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필수다.
급하게 사는 것보다 천천히 살며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슬로우 시티 운동은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을 주제로 하는 데 그 본질은 뒤에 숨어버리고 자칫 관광수입 등의 실리에만 골똘한다면 본래의 취지도 사라져 버리고 마을도 망가질 게 뻔하다. 그곳들이 그동안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외지인들의 부동산 투기 등이 개입되는 일은 없어야겠다. 기존의 자연생태가 철저히 보호되는 가운데 지역민이 중심이 되어 정직한 진정성으로 이 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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