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고독해 보면 / 지성찬

모든 2 2018. 5. 12. 12:45



고독해 보면 / 지성찬 

 

  

새어드는 검은 고독이 가슴까지 차오른다

생활의 주머니도 가랑비에 모두 젖었다


물기를 꾹 짜서 다시 입는다

일기예보는 誤報였다


시집 『서울에 사는 귀뚜리야』(평야,1989)


 

 

  낯설고 어둡고 비좁은 골목처럼 싫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고독'. 문득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아파보이고 새어나온 불빛으로 들여다본 지난 삶의 기억은 무겁다. 뒤돌아본 나의 생이란 도리없이 빈손과 고독에 맞물려있다. 기가 막힌다. 나조차도 나를 소외시킴으로써, 나와의 불편한 관계에 놓일 때가 있다. 내 목소리, 물컹한 뇌에 저장된 기억, 흰 머리카락, 불룩한 배에 돋은 작은 종기, 오줌을 누며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성기, 그 어느 것 하나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심기는 극도로 불편하다. 

 

  이건 외로움과는 분명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이라면 이골이 난 지병이지만 치명적인 고독으로 전이되리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출구가 없다. 따라서 출구전략도 없다. 다만 사람이란 참으로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라는 각성 뿐. 불안, 의심, 혼돈, 절망 같은 불행하고 완고한 느낌들은 내가 나 자신을 소외시킬 때 다가온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정직한 수용과 생에 대한 겸손한 태도야말로 예보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그나마 물기를 꾹 짜서 다시 입게 되는 런닝구 같은 것.  

 

  누가 이 귀뚜리울음 같은 넋두리 따위를 들어줄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매도와 폭력 속에서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소외시키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히 알아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늘은 ‘이것이 정답이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패를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다. 눈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비문증(飛蚊症)의 사소한 증상에도 우리는 신경이 곤두서지만 '날건 말건!'이라고 눈을 찔끔 감아버리기만 하면 세상에 못 견딜 ‘못 볼 것, 못 들을 것’이 어디 있으랴.

 

 오보된 일기예보가 사는 데 치명적이지는 않지 않느냐. 구름 한 점 없다는 오보에 비를 좀 맞은들 어떠랴. 알몸과 다시 꾹 짜서 입어면 될 ‘생활의 주머니’ 밖에 더 젖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