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바다경전 / 가우 박창기

모든 2 2018. 5. 12. 12:26




바다경전 / 가우 박창기


뭍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 바다로 달린다
뜻도 모르면서
바다경전에 푹 빠져서는 읽기만 했었던
나에게 최초의 시는 바다였다
온몸으로 읽는다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만에 찌든 허상에 매달려 있을 때
파도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나를 보고서는
경전의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준 것도 파랑이었다
파랑은 바다만이 뱉어내는 언어
그 언어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었지만
외면한 쪽은 나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즘에 와서야
바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바람은 나보다 경전을 더 잘 읽었다
바람은 파랑을 수도 없이 데리고
경전의 구석구석을 다독이듯 읽었다
그 큰손으로 바다를 다루는데
파도 같은 경전이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보잘것없는 나를 변화시켜야한다는데 동의하고 만다
겨우 몇 장의 경전을 넘겼을 뿐인데
심연의 끝장을 넘기기까지는
몇 번의 허물을 벗고서야 다시 나게 될지
이즘 해변에 서면 파랑이 남긴
언어의 파편을 줍는 것이 고작이다
유년의 빛 바랜 꿈이 잠들어 있는

 



 

미당은 스물세햇 동안 자기를 키운 게 팔할은 '바람'이라 했지만 가우 박창기 시인에겐 쉰몇해 동안 그의 시심을 일구어낸 경작지가 '바다'인 것 같다 이번 아홉번 째 시집의 표제를 기어이 '바다경전'이라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쉬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미당의 어투로 얘기하자면 어떤이는 바다에서 당당함을 읽고 가고 어떤이는 바다에서 용기를 읽고 갔으나 시인은 젊은시절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겸손을 뒤늦게 읽은 듯 하다 그래서 박창기 시인을 가까이에서 뵈면 당당함과 순수함이 한 몸 안에 차례로 녹아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파도의 너울은 수면만 일렁이지만 수면부터 바다 속까지 수직으로 바다전체가 일렁이는 현상을 '파랑'이라 하는데 이는 파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도 생길 수 있으며 너울이 밀려오면 물고기들의 입질이 끊어져 버려 낚시대를 드리우는 일은 포기하여야 한다

 

시에서도 파도와 파랑을 분명히 구분하여  파랑은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었지만' 시인은 번번히 외면하였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늦게서야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만다'고 했다

 

영국의 웨스트 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묻힌 어느 주교의 무덤 앞에 적힌 유명한 비문이 있다 " 내가 젊고 자유로울 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으나 그것 역시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이상은 인터넷에서 한번 보았던 내용을 기억 정리한 것인데 시를 읽으며 바로 생각난 대목이다

 

젊은 한 때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오만과 편견이지만 그로부터 쉬 빠져나오기란 참으로 힘들다 웨스트민스터의 그 주교도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살아가면서 깨우치기란 우리 범인들에겐 결코 쉽지않은 일인데 박창기 시인은 상대적으로 참 젊은나이(?)에 득도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번의 허물을 벗고서야 다시 나게될지' 가슴앓이는 계속된다 지금은 '해변에 서면 파랑이 남긴 언어의 파편을 줍는 것이 고작'일 테지만 시인의 바다경전 읽기가 계속되는 동안 어떤 모습으로 시인이 변모하고 시가 익어가리란 것은 미리 납득되는 부분이다

 

파랑주의보가 몇십번 더 발령되고 바람은 늘 속독으로 앞질러 경전을 읽어가겠지만 어쩌면 먼 훗날 우리는 바다 앞에 가장 당당히 설 수 있는 한 시인의 모습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우리로선 마치 번역된 바다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호사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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