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가을/송찬호

가을/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무명 두 필 잠깨다/손정휴

무명 두 필 잠깨다/손정휴 시집올 때 할머니가 혼수에 넣어준 무명 두 필 장롱 속 까맣게 잠자다 오늘에야 반갑게 찾아진다. 유행의 덧없는 흐름 속 가끔 손길 닿아도 몰랐던 목화 다래 순 같은 숨결이 물레 돌리던 할머니 손 맛 벤 무게로 이제야 저고리 섶에 지긋이 담겨오는데 뻐꾹새 소리로 익어가던 노을빛 같은 것 별빛 싣고 가던 여울 같은 것들이 씨줄 날줄로 지금 온 몸에서 잠깨어 저려오는데 무명치마에 목화꽃 피어놓던 그때 할머니 미소가 오늘에사 환하다. - 계간 대구문학 2008 가을호 - 권정생 선생의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역사의 질곡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어머니와 일곱 남매의 이야기다. 엄마의 무명저고리는 손수 물레를 짓고 베틀을 꽁꽁 짜서 지어 입은 옷이다. 이 저고리에는 자식들의 젖 냄..

친정 / 조정숙

친정 / 조정숙 나 가끔 친정으로 돌아가면 금세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녹신녹신해져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 일들 그만 가마득해지고 길을 가다 지나쳐 만난 사람처럼 남편 얼굴도 서먹서먹해져서 엄마 손에서 익은 물김치 호록호록 떠먹어가며 밤새도록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네. 엄마도 참, 고생이 많수 서로 마음을 만지작거리다가 니,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엄마를 관통한 바람이 목적도 없으면서 천천히 나에게 불어오는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청거린다. - 계간 ‘詩하늘’ 2008 가을호 - 주부들은 명절에 시어머니로부터 ‘어서 친정 가봐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반면 ‘벌써 가려고’란 말을 가장 듣기..

토막말/정양

토막말 / 정양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를 아름답게 보일 요량으로 부터 詩語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는 더욱 없다. 그 시어가 시의..

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권경업

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권경업 아침 산책길 숲 속 거미줄에 이슬이 걸려 있다 다들 눈부셔라, 눈부셔라 하지만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이감도 걸리지 않을 다 드러나 버린 거미줄 안개 낀 삶의 막막함에, 때로는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으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 - 계간 ‘전망’ 2005년 봄호 가운데 - 이슬 걸린 거미줄은 카메라를 소지하고 아침 산책길에 나선 사람에겐 눈부신 피사체다. 하지만 거미로서는 먹이활동의 방해물에 불과할 것이므로 영 재미없는 노릇이다. 더 이상 은밀한 거물망의 구실을 못할 터이므로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이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과학기술부가 올해 전국과학전람회의 대통령상 수상작으로 발표한 '거미는 거미줄의 아..

사랑법 첫째/고정희

사랑법 첫째/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시집 중에서 - 사랑에 있어 지나친 기대감은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인 것 같군요. 아니 기대는 크게 가져 마음껏 설렘의 진동은 느끼되, 촐싹거려 사랑에 코를 빠트리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주문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충분히 알게 되면 믿음이 생기고, 상대를 믿게 되면 그 믿음에 상대가 값해주기를 바라..

복권 가게 앞에서/ 박상천

복권 가게 앞에서/ 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 계간 '시와시학' 1999년 가을호 -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세상인심이 팍팍할수록 호황인 업종이 복권이다. 복권의 꽃인 '로또'는 대략 국민 한 사람당 평균 3장 정도를 구입한다고 한다. 혹시나로 시작한 인생 역전의 꿈이 역시나로 허무하게 끝나는 종이조각. 사는 이에겐 큰 부담을 주지 않아 조세..

초승달 /이기철

초승달 /이기철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글썽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초승달의 여린 눈썹을 제 눈썹에 갖다 대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다 새 날아간 저녁 하늘에 언뜻 쉼표 몇 개가 떠 있다 아마도 누구에겐가로 가서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고야 말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죄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수놓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건드리면 깨진 종소리가 날 것 같은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눈시울 뜨거워지지 않는 사람은 기다림으로 하루를 수놓아 보지 않은 사람이다 -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중에서 - 초승달은 서정시인을 낚기 위한 밤하늘의 낚시 바늘이다. 그 낚시에 맨 먼저 낚일 것 같은 시인이 이기철 시인이며, 이 시는 그 이유를 소상히 입증한다. 미당 서정주는..

손톱 끝에 봉숭아물/김소운

손톱 끝에 봉숭아물/김소운 손톱에 뜬 초승달 속에 둥지 튼 그리움 한데, 살아서는 도저히 그대에게 갈 수 없어 소한 날 내린 눈에 골똘하다 그리움의 하중 깊어 나 그만 달 속에 풍덩 빠져버렸네 젖은 내 몸이 우네, 울고 있네. - ‘대구문학’ 2007년 봄호 - 오래전 TV퀴즈쇼에서 한 젊은이가 부모님을 방청석에 모셔놓고 상금으로 부모님 해외여행 가는데 보태겠노라 호언까지 하고선 첫 단계에서 그만 낙마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문제의 문제는 ‘봉선화와 봉숭아는 같은 꽃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다른 꽃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사실 남들 다 아는데 나 혼자 모르거나 헷갈리는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 가운데도 잘못 알거나 확실히 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저 못된 것들/ 이재무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 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시집『푸른고집』(천녀의 시작,2004)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열심히 일한 그대, 떠나라' 풍의 메시지와 통하지만,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확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더 가깝다. 전자는 돌아올 것을 명확히 계산하고 떠나는 충전의 의미이겠으나, 후자는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대략 난감한 음모다. 어느 것이건 삶의 윤회는 끊임없이 안으로 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