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 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시집『푸른고집』(천녀의 시작,2004)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열심히 일한 그대, 떠나라' 풍의 메시지와 통하지만,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확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더 가깝다. 전자는 돌아올 것을 명확히 계산하고 떠나는 충전의 의미이겠으나, 후자는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대략 난감한 음모다. 어느 것이건 삶의 윤회는 끊임없이 안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밖으로 치고나가고자 하는 원심력 간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비루하고 오욕스러운 현실일수록 일상의 눈 밖에 존재하는 자연으로 부터 구원받기를 본능적으로 꿈꾼다. 원심력에 힘이 더 실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책이 마련된 일탈만 꿈꾼다. 줄로 붙들어 맨 공처럼 튕겨져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바람의 방향으로 원심력을 맘껏 발휘해 볼 것이다. 하지만 의무와 소유 없이 유목의 습성으로 순연한 자연 앞에 두 팔 활짝 펴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노릇이다. 산소 넘치는 그곳엔 까마귀가 울고 독을 품은 전갈도 있다.
그런데 시에서처럼 '저 못된 것들'의 치명적인 유혹이 지속되면 거의 '팜므 파탈' 수준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라는 싱거운 말로는 혜량할 수없는 지경이다.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과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이 바로 남정네를 유혹해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적 요부다. 저것들이 이브이거나 살로메이며, 뫼르쏘의 햇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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