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이기철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초승달의 여린 눈썹을 제 눈썹에 갖다 대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다
새 날아간 저녁 하늘에 언뜻
쉼표 몇 개가 떠 있다
아마도 누구에겐가로 가서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고야 말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죄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수놓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건드리면 깨진 종소리가 날 것 같은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눈시울 뜨거워지지 않는 사람은
기다림으로 하루를 수놓아 보지 않은 사람이다
-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중에서 -
초승달은 서정시인을 낚기 위한 밤하늘의 낚시 바늘이다. 그 낚시에 맨 먼저 낚일 것 같은 시인이 이기철 시인이며, 이 시는 그 이유를 소상히 입증한다.
미당 서정주는 동천(冬天)에서 ‘내 마음 속 우리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며 임의 눈썹을 하늘에다 옮겼지만, 여기선 '초승달의 여린 눈썹을 제 눈썹에 갖다 대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눈썹과 초승달 사이의 거리를 이만큼 좁힐 수 없는 사람은 그리움도 슬픔도 모르는 사람이다. 서정시인은 더욱 아니겠다.
초승달은 밤의 여신이 잃어버린 은장도다. ‘누구에겐가 가서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고야 말’ 잡티 없는 싱싱한 사랑의 열망이다.
그 열망의 팽팽한 긴장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수놓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바로 오늘 초저녁의 하늘 올려다보지 못할 사람은 뜨거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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