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가게 앞에서/ 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 계간 '시와시학' 1999년 가을호 -
경기 침체가 계속되고 세상인심이 팍팍할수록 호황인 업종이 복권이다. 복권의 꽃인 '로또'는 대략 국민 한 사람당 평균 3장 정도를 구입한다고 한다. 혹시나로 시작한 인생 역전의 꿈이 역시나로 허무하게 끝나는 종이조각. 사는 이에겐 큰 부담을 주지 않아 조세저항이 적다고 해서 ‘고통 없는 세금’으로도 불린다.
물론 이렇게 해서 긁어모은 돈이 요긴하게 쓰이긴 한다. 미국의 하버드, 예일 등 명문대학의 설립 기초자금이 복권이었으며, 우리나라도 기금 사용의 투명성이 의심받긴 하지만 대개 각 부처의 특별 사업이나 공익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앞장서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것과 땀 흘려 열심히 버는 돈이 아닌 한탕으로 대박을 꿈꾸도록 환상을 갖게 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시인이 아이 앞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내 아이에게 결코 좋은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 만큼 아이가 자란' 때는 바로 현실이 미덥지 못하고, 자신감이 사라질 때다.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가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는 맞는데, 꿈을 아주 잃어버린 나이는 아니다. 그 서글픈 꿈이 더러는 우리네 아버지들을 견디게도 한다.
복권이 이런 서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짓이라 비난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가족들에게 줄 마지막 사랑일 수도 있겠고, 어떤 이에게는 절망 할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세상을 잡고 있는 한 가닥 끈일 수도 있겠다. 다만 과거 주택복권 시절 송해 선생의 멘트처럼 '맞으면 기쁘고, 안 맞아도 흐뭇한' 피차 그런 복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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