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나비키스 / 장옥관

나비키스 / 장옥관 물이 빚어낸 꽃이 나비라면 저 입술, 날개 달고 얼굴에서 날아오른다. 눈꺼풀이 닫히고 열리듯 네게로 건너가는 이 미묘한 떨림을 너는 아느냐 접혔다 펼쳤다 낮밤이 피고 지는데 두 장의 꽃잎 잠시 머물렀다 떨어지는 찰라 아, 어, 오, 우 둥글게 빚는 공기의 파동 한 우주가 열리고 닫히는 그 순간 배추흰나비 粉가루 같은 네 입김은 어디에 머물렀던가? - 시집『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젊은 남녀는 만난 지 평균 일주일이면 키스를 감행한다고 한다. 첫 키스까지 걸리는 시간이 한 달을 넘는 경우는 드물고 그럴 땐 오히려 주위의 조롱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푸른 시절 모든 사랑의 단계들이 신비롭고 조심스럽기만 해서 손 한번 잡는데도 몇 달이 걸리곤 했던 선도 높은 두근거림은 이제 오간데 없다...

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 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중에서 - 한 보수 조간신문 1면에 '국민은 울고 있다'란 제하로 가락시장의 어느 아낙이 대통령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리던 날 대구에도 첫 눈이 내렸다. 여느 때처럼 첫 눈이..

그대에게 / 최영미

그대에게 / 최영미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그리운 남풍 2/ 도광의 잔치가 끝나도 큰방에 둘러앉아 밤늦도록 놀았다. 잠잘 데가 모자라 마루에서 베개 없이 서로 머리 거꾸로 박고 자면서도 소고기국에 이밥 말아 먹는 게 좋았다 "언니야, 엊저녁 남의 입에 구린내 나는 발 대고 잤는 거 알기나 아나?" "야가 뭐라카노, 니 코 고는 소리 땜에 한숨도 못 잤데이" 주고받는 말이 소쿠리에 쓸어담을 수 없는 헌것이 돼버린 지금, 등 너머 흙담집 등잔마다 정담은 밤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멀리 시집가서 사는 누님을 하룻밤이라도 더 자고 가라고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며 붙잡던 솔잎 냄새 나는 인정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해산한 딸 구안(苟安)하고 돌아오는 동리 앞 냇가에 눈물 흔적 말끔히 씻고 가없이 펼쳐진 하늘 쳐다보고는 마음 안에 갇힌 막막한 울음을 걷어내고..

튤립에 물어보라/ 송재학

튤립에 물어보라/ 송재학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차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 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 보라. - 시집 중에서 - . 17세기는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다. 이 때 투기의 대상으로 튤립의 광풍이 불었다. 튤립의 소유는 곧 부와 교양의 상징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광기와 어리..

꽃 진 자리/ 이승엽

꽃 진 자리/ 이승엽 아내가 출산을 했다. 떨어져 나간 아픈 흉터가 붉게 물들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중심을 잃어버린 몸이 하늘하늘 그러나 아내는 아프지 않다고 했다 낮에는 볕, 밤에는 별과 달이 따뜻한 어머니 품 같다고 산후조리 이만큼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아내는 거듭 괜찮다, 괜찮다고 했다 아내의 몸에 별꽃이 피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많이 다녀갔을까 아내는 건강한 사내아이의 울음처럼 봄바람 아지랑이 물결 따라 지금 울고 있다 - 시하늘 2008년 여름호 - 시인의 경험 밖 풍경인데도 참 천연덕스럽다.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사유되진 않았지만 심한 상상력이 ‘아내’의 울음을 건져내고 있다. 시의 제목을 ‘꽃이 진 자리’라고 해두지 않았다면 어디 해산한 아낙의 자리를 꽃이..

고바우집 소금구이 / 김선우

고바우집 소금구이 / 김선우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 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 환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 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

껌씹기/ 강해림

껌씹기/ 강해림 개정판 국어사전을 찾다가 껌을 씹는다 천천히 아무 저항 없이 씹히는 껌은,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부터는 껌이 나를 씹는다 무엇이든 오래 질겅거리고 씹고 탐닉하다 보면 말랑말랑해지고 어느 순간 카오스의 붉은 혀가 찾아든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 야간작업 하던 나는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간다 한 봉지의 쌀과 석유와 맞바꾼 가난한 영혼은 어느 덧 기름냄새가 나고, 자꾸만 달라붙는 잠과 피로도 육체를 녹슬게 할 순 없었던 것 하루를 저당 잡히고, 사과맛 박하맛 톡톡 쏘는 오렌지맛…… 인생이란 장미빛 향기를 찾아 떠난 발걸음들이 보도블록 붙은 껌을 밟으며 돌아온다 썰물처럼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 껌씹기는 이빨이 썩을 염려가 없으므로 안전하고, 후우 풍선껌을 불어날리듯 그가 제공한 짧은 공상도 ..

저문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저문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중에서 - 삽질은 모든 육체노동을 대변한다. 노동은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값지고 정직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보다는 부당하게 취급당하기 일쑤다. 노동에 바치는 땀에 비해 여전히 그 대접은 소홀하다. 때로 그것은 열불이 나고 통탄해마지 않을 노릇이지만..

흙발/ 손남주

흙발/ 손남주 변두리 비탈밭이 가뭄에 탄다 아프게 껍질을 깨는 씨앗, 물조로의 물도 목이 마르고 덮었던 마른 풀 걷어내자, 후끈 숨막히는 흙냄새 사이 노란 떡잎, 무거운 흙덩이 이고 푸른 뜻 굽히지 않는다 힘겨운 고개,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하늘 보고 꼿꼿이 일어서는 흙발 지그시 디디고 섰다. - 시하늘 2008 가을호 -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거나 대수롭잖게 생각해서 그렇지 둘러보면 세상에는 경탄의 대상으로 가득하다. 인생은 매순간 그 경이로움을 만나는 여정이다. 겨울엔 식물이 다 죽은 듯 보이지만 씨앗으로 겨울을 나고, 뿌리로도 겨울을 견딘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삭정가지를 긁어모으기 위해 찾은 뒷산에서 문득 작고 푸른 것들이 발에 채이기도 하며, 말라죽어 뽑아내 버린 아파트 베란다의 난화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