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설날 아침에/ 김종길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집 '성탄제(1969)'중에서 - 대구에 해맞이동산이라고 있다. 동촌 금호강이 내려다뵈는 야트막한 유원지 자연동산에 있는 소규모 공원이다. 한 때 우리 가족이 ..

꽃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꽃이름 외우듯이/ 이해인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돌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채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나르는 향기가 되자 - 이해인 꽃시집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2004,분도출판사) 중에서 - 꽃은 물론 아름답지요. 그런데 꽃 이름은 더 아름답습니다. 그 꽃의 이름을 외우고 이름을 가만 불러주면 꽃만이 아니라 부르는 사람까지도 아름다워진..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 속에서 너의 평온을 잃지 말라. 침묵 속에 어떤 평화가 있는지 기억하라.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네가 알고 있는 진리를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라. 다른 사람의 얘기가 지루하고 무지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들어주라.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소란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피하라. 그들은 정신에 방해가 될 뿐이니까. 만일 너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면 너는 무의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 것이다. 세상에는 너보다 낫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네가 세운 계획뿐만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 일에 열정을 쏟으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진..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집 중에서 - 지금은 떼는 사람이 예전만큼 많지는 않아 흔하게 보진 못하지만 불붙은 연탄 한 장으로 뜨끈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 이 여인을 돌로 쳐라"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바라사이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의 어법으로 시인은 우리들 위선의 무리에게 말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안도현 시인은 더 이상 쓸모없는 연탄재에서 단박에 사랑의 극치를 읽어내었으므로 그 날카로움은 단 세 줄로 충분하였을 것이나 대신 같은 시집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작품집(문학사상사/1995) 이 시는 소월문학상을 수상한 역작이긴 하지만 시의 배경에는 시인의 쓰라린 비밀이 도사려있는 듯하다. 그녀는 우리나이로 올해 예슨 하고도 일곱인데 35년 째 혼자 산다.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인 정현종 시인과 갈라선 것이다. 어느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보..

그렇지만/ 류영구

그렇지만/ 류영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늦게까지 전도서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박꽃이 하얗게 달빛 먹고 피어있는 초가지붕 이어진 골목길을 누군가 옆에서 내 손을 꼬옥 잡고 함께 걸어갔다 창밖 새벽 새소리가 나를 깨웠다 꿈이었다 그렇지만 청아淸雅한 꿈이었다 - 시하늘 2008 겨울호 -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전도서 1장은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로 이어져서 나중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삶의 덧없음과 보잘 것 없음을 외치면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도 더하느니라’며 끝을 맺는다. 시인이 그 전도서 구절을 읽다가 잠이 들었..

풀잎을 보며 / 박곤걸

풀잎을 보며 / 박곤걸 내가 빈손을 하고 사람의 허세를 부린 탈을 벗는다 해도 바람에 누웠다 일어서는 풀잎만도 못하리라 빈손바닥에 풀물이 묻어난다 이순에 다시 쓰는 나의 詩는 남루함이 비열함보다 좋았던 풀잎의 지조인가 입이 천근의 무게 귀를 만리 밖에 떼어놓아도 나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만리 밖에서 몰아쳐 온다 온몸에 풀물이 감돌고 있는지 풀잎이 누웠다 일어서며 손 저어 일러주는 말귀를 알 듯 말 듯 더 몰라라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중에서 - “수많은 사람이 써 온 수많은 시구에 나도 몇 줄 보태 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보다 못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네. 나를 용서해 주게, 나의 삶도 끝나고 있네. 달나라에 사람의 첫발을 내디딘 발자국은 아니었어도 어쩌다 잠시 반짝했다면 내 빛, 내 소리 아..

겨울사랑 / 고정희

겨울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중에서 - 옛날엔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는 통속한 질문도 더러 주고받았다. 눈이란 순백의 강하물 때문에, 혹은 방학이 있어서, 그리고 겨울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겨울이 좋다고들 답하지만, 무엇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매력은 그 차가움으로 뜨겁게 사랑을 촉진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문정희 시인도 ..

꽁치와 시 / 박기섭

꽁치와 시 / 박기섭 포장집 낡은 석쇠를 발갛게 달구어 놓고 마른 비린내 속에 앙상히 발기는 잔뼈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낱낱이 발기는 잔뼈 -가령 꽃이 피기 전 짧은 한때의 침묵을 -혹은 외롭고 춥고 고요한 불의 극점을 -무수한 압정에 박혀 출렁거리는 비애를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부어도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酒精)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쓸쓸히 고이는 주정(酒精) - 시조집 ‘비단 헝겊’ 중에서 밥상 위 잘 굽힌 꽁치는 그저 밥의 찬이나 술의 안주일 뿐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 없이 젓가락으로 살을 발려 먹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시인은 꽁치의 살아생전 저 태평양 푸른 바다 깊숙이 자유롭게 유영하던 기억을 애써 발라낸다. ‘낱낱이 발기는 잔뼈’에서 고생대의 적막을 들쑤시기..

의자 / 조병화

의자 /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오는 어린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13인 시집‘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중에서 - 사람이란 원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장 누워있으면 좀이 쑤셔 그만 일어서 걷고 싶다. 그 속물적 인간의 비틀림 과정 가운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존재하는 물건이 의자다. 사람은 바닥에 닿는 신체의 표피 면적이 넓을수록 편안하며 반대로 그 면적이 작을수록 불편하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온종일 누워만 있으면 그게 어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