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작품집(문학사상사/1995)
이 시는 소월문학상을 수상한 역작이긴 하지만 시의 배경에는 시인의 쓰라린 비밀이 도사려있는 듯하다. 그녀는 우리나이로 올해 예슨 하고도 일곱인데 35년 째 혼자 산다.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인 정현종 시인과 갈라선 것이다. 어느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보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환멸과 절망은 실로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부부관계란 모름지기 그들만이 아는 일. 아니 그들조차도 모를 수 있는 일. 오랜 기간 혼자 살며 뒤통수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많이 들었겠고 남에게 그 진실의 내막을 틀어놓기는 더욱 쉽지 않았으리라.
이혼 후 한동안 시도 쓰지 않고 모교인 이대 앞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며 혼자만의 생계를 유지하다 죽을 결심도 수차례 하였단다. 그러다 우연히 부안의 내소사 근처 직소폭포를 찾은 후 그 '백색의 정토' 앞에서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지를 곧추세워 한때는 하루에 한편씩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은 생이 몹시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무엇엔가 죽도록 시달리던 마음을 간신히 추슬렀을 때 하루치의 희망이라도 쓰자는 생각에서 매일 시를 쓴다고 하였다.
한해가 스산하게 저물어가는 이때 올 한해 잘 못 채워진 단추는 없었던가. 왜 없었겠니 우리는. 그 쉽지 않은 삶의 단추 채우기는 내년에도 계속될 터인데 반성문 쓰듯 일기 쓰듯 하루 한편 시가 배설처럼 쏟아졌으면 좋겠다만 시가 아무려면 옷 한 벌 입기보다 쉬울까? 그래서 시는 못쓰고 시 밑에 어설픈 단상이나 써보는 것인데 그것 역시 쉽진 않다.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0) | 2018.06.17 |
---|---|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0) | 2018.06.17 |
그렇지만/ 류영구 (0) | 2018.06.17 |
풀잎을 보며 / 박곤걸 (0) | 2018.06.17 |
겨울사랑 / 고정희 (0) | 2018.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