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류영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늦게까지 전도서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박꽃이 하얗게 달빛 먹고 피어있는
초가지붕 이어진 골목길을
누군가 옆에서 내 손을 꼬옥 잡고
함께 걸어갔다
창밖 새벽 새소리가 나를 깨웠다
꿈이었다
그렇지만 청아淸雅한 꿈이었다
- 시하늘 2008 겨울호 -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전도서 1장은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로 이어져서 나중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삶의 덧없음과 보잘 것 없음을 외치면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도 더하느니라’며 끝을 맺는다.
시인이 그 전도서 구절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어린 시절 걷던 동네 골목길이라도 다시 만난 모양이다. 그의 손을 꼭 잡은 이는 어머니일 수도 있겠고 어머니 보다 더 강력한 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품질 좋은 꿈인 것만은 분명하다. 꿈속에서 ‘박꽃이 하얗게 달빛 먹고 피어있는 초가지붕’같은 박수근풍의 풍경을 보는 것 자체가 그리 흔치 않은 노릇이다. 베개머리에서 지갑을 열거나 누구를 밟을 생각으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면 필경 그 꿈은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라 좋은 품질의 꿈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전도서에서 말한 ‘헛된’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솔로몬은 말한다. 인생이 헛되다는 걸 너희는 아느냐고. 세상 사람들은 그 헛됨을 깨닫지 못하고 인생에 무엇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살지만 갈 때서야 그 허방을 깨우친다고.
‘그렇지만’ 그건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고 삶의 겸손한 태도를 옹호하는 잠언이지 생애 전반이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덧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시인이 강조한 ‘그렇지만’이란 접속부사도 수긍은 하되 모두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란 말일 터. 꿈은 꿈이로되 헛되지만은 않아 맑고 우아해 기분 좋은 꿈처럼 거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때 경계를 지우며 ‘샹그리라’는 찾아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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