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을 보며 / 박곤걸
내가 빈손을 하고
사람의 허세를 부린 탈을 벗는다 해도
바람에 누웠다 일어서는 풀잎만도 못하리라
빈손바닥에 풀물이 묻어난다
이순에 다시 쓰는 나의 詩는
남루함이 비열함보다 좋았던 풀잎의 지조인가
입이 천근의 무게
귀를 만리 밖에 떼어놓아도
나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만리 밖에서 몰아쳐 온다
온몸에 풀물이 감돌고 있는지
풀잎이 누웠다 일어서며
손 저어 일러주는 말귀를 알 듯 말 듯 더 몰라라
- 시집 "하늘 말귀에 눈을 열고" 중에서 -
“수많은 사람이 써 온 수많은 시구에 나도 몇 줄 보태 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보다 못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네. 나를 용서해 주게, 나의 삶도 끝나고 있네. 달나라에 사람의 첫발을 내디딘 발자국은 아니었어도 어쩌다 잠시 반짝했다면 내 빛, 내 소리 아니고 반사한 것뿐이네. 나는 사랑했다네. 시를 쓰는 언어를... 그러나 변명은 않겠네. 아름다운 시어를 찾는 것이 살생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라네”
1984년 ‘프라하의 봄’ 등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체코 시인 jaroslav seifert(1901-1986)가 수상 이후 생전에 쓴 자신의 비문이다. 사후 실제로 비문에 그렇게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에 대한 깊은 성찰의 말씀을 큰 시인으로부터 다시 듣는다. 어쩌면 풀벌레의 울음소리보다 하찮고 인류에 무얼 보탤 수 있을지에 그 생각이 미치면 스스로 미약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가 살생보다 낫다고 하는 고도의 강조법에서 우리는 시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껴안고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읽게 된다.
지난 12월21일 온 생애를 ‘남루함이 비열함보다 좋았던 풀잎의 지조’로 시를 쓰고, 그 도구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온 박곤걸 시인이 타계했다. 시인 역시 ‘세이페르트’처럼 스스로 ‘풀잎만도 못하리라’며 짙은 페이소스를 뱉어내고 있지만 풀잎에 반사된 그의 언어로부터 말귀를 여는 후학들이 적지 않아 시인이 잠든 고향 땅 망산에서 손 저어 일러주는 말씀에 그들은 한참동안 고개 숙여 솔깃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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