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267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시집 중에서 - 지린내 나는 심야극장의 구석자리에서 시인이 돌연 청춘을 마감한지 오는 주말이면(3월7일) 꼭 20년이 된다. 이쯤이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처구니 / 이덕규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여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시집 중에서 - 한 대학 총장이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 자신의 제자를 가리키며 “이런 자그마한 토종..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시선집 '참 좋은 당신(2004 시와시학사)' 중에서 - 원폭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된 절망의 땅 히로시마에서 맨 먼저 새싹을 틔운 것이 쇠뜨기라는 잡초였다고 합니다. 들판에 지천으로 널린 쇠뜨기의 새싹 안에는 핵폭탄보다 더 강한 에너지가 숨어있고, 그 새싹의 실제 팽창 압력은 수십 기압에 이르러 아스팔트까지 뚫고 나오는 것이겠지요.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무거운 흙의 두께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것은 ..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시집 중에서 - 이 시는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산행/ 김종근

산행/ 김종근 대청봉 별빛 배낭 속으로 쏟아져 온다. 그 무게만큼 오히려 가벼워지는 내 일상의 무게들 시름 한 줌 들어내고 염소자리 별 넣고 짜증 한 줌 떨어내어 물병자리 별 넣고 귀때기봉 새벽바람에 더운 몸 땀방울 절로 씻기어지면 아침 배낭 속 별들이 햇빛 한 잎 문 산새 되어 푸드덕 날아오른다. - 문학예술 2007 겨울호(23회 시부문 신인상 수상작) - 70년대 중후반 군 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밤마다 부대 뒷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점호를 받았다. 그다지 힘들지 않게 오르는 산길이라 내무반에서 빳빳하게 도열하여 받는 것보다야 낫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역시 강제된 집단산행이고 보면 결코 가볍고 산뜻할 수는 없었다. 대청봉은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가장 짧은 코스인 오색약수에서 올..

동그라미/ 민병도

동그라미/ 민병도 사는 일 힘겨울 땐 동그라미를 그려보자 아직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리 물소리에 길을 묻고 지는 꽃에 때를 물어 마침내 처음 그 자리 홀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여,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 시집 중에서 - 사는 일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조언을 흔히 한다. 요즘은 ‘인생, 그 뭐 있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말은 과욕을 버리고 자족하면서 살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왠지 적당히 눈 감고 대충 즐기면서 살자는 뉘앙스가 더 진하게 풍긴다. 그런 친구에게 힘들 때 동그라미를 그려보라면 ‘놀고 있네’ ..

그대가 별이라면/ 이동순

그대가 별이라면/ 이동순 그대가 별이라면 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모습을 비추어주는 저녁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무라면 저는 그대의 발등에 덮인 흙이고자 합니다 오, 그대가 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 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 시집 (시선사,2004) 세상의 모든 사랑시와 연가는 다 그게 그것 같고, 어디서 한번은 들은 듯해서 사실 전혀 새로울 게 없어 보입니다. 이 시만 해도 먼저와 나중을 떠나 왠지 처음 읽는 시가 아닌 듯 느껴지실 겁니다. 얼른 그대를 별에 비유한 것에서 노을로 옮겨오면 이동원의 이별노래가 생각나는군요.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물론 정..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예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시선)' 중에서 - 브래지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 여인들이 가슴..

행복 / 유치환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