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예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추기경님은 일생의 지표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삶을 사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그리 사시다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가난하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과 늘 함께하고자 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지만, 실상은 그렇게 잘 하지 못하셨다는 참회에 가까운 술회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난 바보야!’라고 하시면서 아이처럼 웃으시기도 하였고요.
정호승 시인은 2004년 이 시를 통해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감싸 안는 추기경님의 마음을 노래했다고는 하나 한편으론 추기경님께 더 많은 치유의 손길을 요청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 존재만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힘이 되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분이시란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추기경님이시니 큰 별을 잃었다거나 국가적 큰 손실이란 표현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단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추기경님께선 하루 한 순간을 소중히 하고 최선을 다해 마지막인 듯 살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더는 이 세상의 풍파 속으로 내려오지 마시고 주님 안에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만 당신의 그 기도하는 손은 자주 그리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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