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민병도
사는 일 힘겨울 땐
동그라미를 그려보자
아직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리
물소리에 길을 묻고
지는 꽃에 때를 물어
마침내 처음 그 자리
홀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여,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 시집 <내 안의 빈집/2008,목언예원> 중에서 -
사는 일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조언을 흔히 한다. 요즘은 ‘인생, 그 뭐 있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말은 과욕을 버리고 자족하면서 살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왠지 적당히 눈 감고 대충 즐기면서 살자는 뉘앙스가 더 진하게 풍긴다. 그런 친구에게 힘들 때 동그라미를 그려보라면 ‘놀고 있네’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라 넌지시 일러준대도 선뜻 따라할 것 같지는 않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은 마음을 둥글게 여미어 보겠다는 의미와 더불어 통 큰 담대함을 스스로 깨우치게도 하나보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는걸 보면 얼마간의 제동이나 단념도 필요하다는 말씀이겠다. 자연에 몸과 생각을 맡기고 허허롭게 동심으로 한 바퀴 돌아 처음 동그라미를 시작할 때의 그 점에 마침내 당도하면 크고 둥근 '텅빈 충만'의 세계 하나를 갖는다.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의 동그라미는 밀실인 동시에 광장이다.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환하게 소통되는 그 광장의 그림은 또렷해도 경계가 없다. 그것은 영혼의 영역이며 사랑의 영토이기도 하다. 삶을 들여다보려면 삶 바깥으로 나오고, 사랑을 보려거든 사랑 밖으로 나오라. 자맥질하는 생명의 계절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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