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행복 / 유치환

모든 2 2018. 6. 17. 16:31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기혼의 입장에서 그 대상의 과녁을 정확히 겨누고 아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사랑의 헌시를 날린 이는 아마도 청마가 유일하지 싶을 만큼 청마와 정운(이영도의 아호)의 사랑은 마치 황진이와 명창 이사종의 6년간의 계약사랑 만큼이나 시대의 파격을 담은 용기 있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사랑을 과연 정신적인 사랑 만이었겠냐는 의혹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청마와 정운의 사랑을 플라토닉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청마는 강물이 넘치듯 흘러내리는 생명의 열정을 적어 연인 정운에게 바치기를 20여년. 죽음 문턱까지 5천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누가 이토록 진하고 절절한 사랑의 밀어를 매일 새벽마다 흘려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차라리 축축한 감정의 물기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의 폭발이었으리라. 심지어 죽은 뒤에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말도 편지엔 수없이 보인다. 청마에게 있어 사랑은 하나의 종교요 자기 구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청마의 부인이 과부 이영도와의 사랑을 묵인해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래전 김윤식교수가 진행했던 ‘명작의 고향’이란 TV프로에서 청마의 부인이 질투가 나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쩌겠어요."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초콜릿과 사탕이 오고가는 이 시대에도 이런 파격의 편지 사랑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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