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시선)' 중에서 -
브래지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 여인들이 가슴을 조금이라도 작게 보일 요량에 천을 둘러댄 것으로 코르셋과 더불어 억압의 이너웨어였던 셈이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 때로는 없는 가슴을 뻥튀기거나 가슴을 돋보이기 위해, 또는 옷맵시를 위해 개량된 아름다운 구속이었으나 60년대엔 여성해방의 상징이라며 기성품 블래지어를 쌓아놓고 불태웠던 퍼포먼스도 있었다.
그때 지금과 같은 컵별 사이즈를 처음 고안하고 재봉하여 공장생산을 시도한 '로젠탈'에게 브래지어 산업의 쇠퇴로 이어지지 않겠냐며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당시 그녀가 했던 유명한 말 " 민주사회에서 옷을 입건 안 입건 그건 자유죠. 하지만 35세가 지나면 여성의 몸은 받침 없이는 선이 무너져버리죠. 결국 시간은 내편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35세가 지난 아내를 둔 남편에게 '아내의 브래지어'는 몸의 형상과 변화에 대한 곡절이 고스란히 담긴 비망록이다. 박영희 시인은 민족운동을 위해 무단으로 북한에 다녀온 혐의로 91년에 영어의 몸이 되어 98년에 특사로 풀려나 7년간 감옥에서 보낸 특별한 세월이 있다. 그간 젖먹이였던 어린 딸애가 초등학생으로 자라났고 긴 세월 아내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이 그윽이 담긴 시가 바로 '아내의 브래지어'다. 오래전 '시하늘' 낭송회에 초대되어 그가 직접 소개했던 시 '피죤을 넣다가'를 기억해보면 그의 곡진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세탁기 안의 풍경 묘사가 그리 정겨울 수가 없다. '아내의 브래지어와 내 사각 줄무늬팬티가 어깨동무하며 얼싸안고 빙빙 돌아가고...' 세탁기를 돌리며 향기로 전하는 그윽한 사랑은 그의 이력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꼭 아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지 모른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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