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씹기/ 강해림
개정판 국어사전을 찾다가 껌을 씹는다
천천히 아무 저항 없이 씹히는 껌은,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부터는 껌이 나를 씹는다
무엇이든 오래 질겅거리고 씹고 탐닉하다 보면
말랑말랑해지고 어느 순간 카오스의 붉은 혀가 찾아든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 야간작업 하던 나는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간다
한 봉지의 쌀과 석유와 맞바꾼 가난한 영혼은 어느 덧 기름냄새가 나고,
자꾸만 달라붙는 잠과 피로도 육체를 녹슬게 할 순 없었던 것 하루를 저당 잡히고,
사과맛 박하맛 톡톡 쏘는 오렌지맛……
인생이란 장미빛 향기를 찾아 떠난 발걸음들이 보도블록 붙은 껌을 밟으며 돌아온다
썰물처럼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 껌씹기는 이빨이 썩을 염려가 없으므로 안전하고,
후우 풍선껌을 불어날리듯 그가 제공한 짧은 공상도 끝나갈 무렵
껌.껌껌나라.껌정.껌둥이……
사전 속의 껌은 온통 껌정 투성이다 시간의 검은 활자들이 걸어나와
다시 개정판을 찍을 수 없는 나를 읽다 가고,
사전을 덮자 휴지통 속으로 그가 나를 뱉는다
검은 길 위에서, 껌을 뱉기는 쉬워도 자꾸만 달라붙는 나를 떼어내기란 어렵다
-시집 ‘환한 폐가’ 중에서 -
한 재벌회사의 성장에는 고무에 단물을 입힌 껌을 팔아 번 돈이 큰 밑천이 되었다. 질겅거리며 단물을 빠는 동안 잠시 환해지는 구강을 위해 기꺼이 지불한 동전 몇 닢이 휘황한 빛의 건물을 세웠고, 또 이 땅에서 가장 높고 찬란한 구조물을 세우려 한다.
결국 말랑말랑해져서 너 맛도 내 맛도 아닌 다음에는 가래처럼 탁 뱉어내고야말 삼킬 수 없는 것이지만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는 진정제 구실을 했던 것일까. 9회 말 투아웃에 볼카운트 투 쓰리 3루 주자가 있어 딱 한방이면 역전이 될 상황에서 투수가 질겅거리는 껌. 그 정도면 아무리 여유를 가장하더라도 이미 ‘껌이 나를 씹는’ 카오스의 시점이다. 유쾌하고 발랄하게 보이길 원할 뿐 결국 껌으로부터 자기가 씹히고 만다.
돌아가는 톱니바퀴 앞에서 야간작업하던 ‘나’도 그렇다. ‘인생이란 장밋빛 향기를 찾아 떠난 발걸음들이 보도블록 붙은 껌을 밟으며 돌아’올 때는 콜타르가 되어버린 뱉어낸 가래처럼, 사전 속의 숯검정처럼 온통 껌정 투성이로 그가 나를 뱉는다. ‘뱉기는 쉬워도 자꾸만 달라붙는 나를 떼어내기’란 어려운 껌 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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