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중에서 -
삽질은 모든 육체노동을 대변한다. 노동은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값지고 정직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보다는 부당하게 취급당하기 일쑤다. 노동에 바치는 땀에 비해 여전히 그 대접은 소홀하다. 때로 그것은 열불이 나고 통탄해마지 않을 노릇이지만 현실의 분노와 고통마저 저물녘 흐르는 강물 앞에 씻어내면서 오히려 삶을 정화하고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다.
저문 강에 선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노을과 같아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는 자조와 탄식 그리고 생의 달관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삽자루에 맡긴' 묵묵한 노동의 성실함을 누가 제대로 알아주랴. 대가가 못 미치는 노동의 고단함에 깃든 슬픔을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삭일 뿐. 강은 피곤했던 하루를 씻어줄 뿐 아니라 의연한 깊이를 보여주어 세상살이에 지친 이에게 위안을 준다.
저물고 저물어 어둠이 깊어 가면 비록 샛강의 썩은 물일지라도 캄캄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인간에 의해 썩어 가는 강에 비친 달에서 노동의 피로와 우울함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걸 보면. 삶이란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의 과정이긴 하지만 달이 저문 강을 비추고 다시 돌아가듯이 우리는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기꺼이 다시 되돌아가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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