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불빛 / 이태수
왜 이토록이나 떠돌고 헛돌았지
남은 거라고는 바람과 먼지
저물기 전에 또 어디로 가야 하지
등 떠미는 저 먼지와 바람
차마 못 버려서 지고 있는 이 짐과
허공의 빈 메아리
그래도 지워질 듯 지워지지는 않는
무명(無明) 속 먼 불빛 한 가닥
― 신작시집 『회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2008』중에서 -
이슬방울과 유리알의 글썽임과 투명함에서 바람과 먼지, 그리고 쳇바퀴로 그의 시어가 옮겨왔다. 명징한 것들에서 허무의 색깔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 배경에는 34년간 몸담았던 신문사를 떠나면서 갖는 소회의 일단이 개입되었지 싶기도 하다. 더구나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아우를 기리는 마음까지 보태졌으니 그 색깔은 잿빛 언저리일 수밖에 없겠다. 아울러 독자들에게도 더 깊은 사유와 철학을 요구하고 독려한다.
인생무상, 일장춘몽, 공수래공수거 따위의 말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을 것들,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아낌없이 줘 버릴걸... ‘미련’이란 알면서 행하지 못한 나날을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보는 미련한 생각이다. 가만 보면 삶의 족적이 큰 유명인사일수록 회한의 정도 크더라. 시인 역시 잘 알려진 언론인이며, 지역 문화계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동안의 업적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헛돌았던 쳇바퀴로 지난 길을 비유했다.
여기서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때 강우일 주교께서 하신 고별사가 생각난다. '추기경님 정도 되시는 분을 저리 족치시면 나중에 우리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겠냐고' 그 화법 그대로 빌리자면 매일신문의 문화부장과 논설주간까지 지내신 이태수 시인 같은 분이 허무를 느낄 지경이면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중에 느끼게될 허무의 무게는 얼마나 무겁겠냐고...
시인은 ‘차마 못 버려서 지고 있는 이 짐’을 지고 다시 길 없는 길을 나섰다. 조금은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특유의 품위와 여유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매 순간 감사와 희망을 품에 안고 삶의 점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깍지 낀 손으로 기도할 것이다. 시인 스스로도 ‘시를 좀 더 가까이, 느긋하게, 끌어안고 싶다’고 했듯이 시간으로 부터의 자유와 헐거움이 고스란히 시를 쓰는 일에 바쳐질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은 예감이 바로 ‘무명 속 먼 불빛 한 가닥’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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