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하나/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 시집 「좀팽이처럼/1988,문학과 지성」 중에서 -
모든 존재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홀로 태어나 무리를 이루고 살다가 다시 홀로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뒤늦게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올 수능시험 문학문제 지문으로 출제된 현대시다. 저마다 한 잎씩 돋아나고 떨어지지만 그 개체는 세상과 화합할 수밖에 없는 유의미의 존재임을 인식한다. 가까운 것에서 먼 것을 알아가듯 ‘나뭇잎 하나’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뭇잎 하나’가 우주며, 그 생몰이 곧 삶의 그것임을 일깨운다.
하지만 신록이 우거졌을 ‘젊은 시절’에는 그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드는 ‘중년’에도 몰랐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질’때도 못 느꼈던 것을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가 문득 혼자서 떨어질’때 비로소 비장한 자연의 섭리를 느낀다. 쉬운 일상의 언어와 명료한 구문의 시에서 깊은 삶의 사유를 담고 있는 김광규 시인 특유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 잔잔하고도 사색적인 시다.
<참고>
수능 문제는 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것인데,
①1연, 2연에서 유사한 구조의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화자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②1~3연에서 ‘골짜기’→‘길’→‘대추나무’→‘나 뭇잎 하나’로 시적 대상이 바뀌면서 화자와 대상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③1~4연에서 ‘그러니까’, ‘문득’, ‘마침내’와 같은 부사는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인식에 주목하게 하고 있다. ④4연에서 ‘저마다 한 개씩’이라는 시구를 반복함으로써 세상과 화합할 수 없는 존재의 고뇌를 강조하고 있다. ⑤4연에서 화자는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자연물의 변화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
이상 다섯 개의 보기 가운데 정답은 물론 ④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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