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모든 2 2018. 6. 17. 15:37

 

 

첫 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 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중에서 - 

  

  한 보수 조간신문 1면에 '국민은 울고 있다'란 제하로 가락시장의 어느 아낙이 대통령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리던 날 대구에도 첫 눈이 내렸다. 여느 때처럼 첫 눈이라 해도 좋을 지 말지 찜찜하게 내렸던 것과는 달리 짧지만 제법 눈다운 눈을 뿌렸다. 서해안 쪽은 대설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발령된 것을 보면 본격적인 한파를 예고하는 눈이기도 했다.

 

 작은아이 세 살 때, 아마도 사물을 감식해내는 눈이 막 열릴 무렵 밤새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덧칠된 광경을 아침에 일어나 보고선 "아빠 외계인이 왔나봐!" 생애 처음으로 눈 구경을 한 아이의 눈엔 달라진 세상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눈이란 강하물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시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랄 때 장독대 위에 함지박 만하게 내려앉은 눈하며, 기와 지붕위에 멋진 곡선을 따라 덥힌 눈의 미학은 요즘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눈으로 채색된 풍경은 누구에게나 얼마간 환상적 기분을 갖게 한다. 더불어 눈이 오면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되고 노래하는 마음도 생기나 보다.

 

 시인이 바라보는 첫 눈 오는 날은 새들의 겨울꿈 조차 신비하지도 더 이상 부럽지도 않다며 몇 섬이고 하늘의 별도 따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눈이 오고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로 날렸으면 좋겠다. 그래, 시래기 파는 아낙의 눈물도 향기 되어 훨훨 날아가도록 그렇게 눈 한 번 펄펄 오지게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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