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그대에게 / 최영미

모든 2 2018. 6. 17. 15:36

 

그대에게 / 최영미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중에서 - 

 

 

 감각적이고 도발적인데다 단단히 난 쌤통의 대응 방식이 발칙하기까지 하다. 오래전 사귀던 남자에게서 한번 ‘짤렸던’ 참담한 경험이 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엄마로부터 "네 인생은 실패야. 나이 서른에 남자가 있냐 애가 있냐. 돈이 있냐 명예가 있냐. 넌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니?" 송곳 같은 말까지 들었으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비장한 밥상이 차려질만 했다.

 

 소문은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시골 구석구석까지 보급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은밀히 유통되기도 한다. 진행형의 사랑이거나 지나간 사랑 그리고 다가올 사랑까지도 포장만 바꾸면 언제나 새 물건이 된다. 상대를 속이고 속아주는 바탕위에서 진행되는 불온한 사랑마저도 수요와 공급은 충분하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낡거나 헤지지 않아 폐기되는 법이 없다.

 

 연애시도 허상이고 사기일망정 결코 그 색이 바래지진 않는다. 그 연애시가 정작 당사자 아닌 다른 이에 의해 작성된 것일지라도 끝도 없이 유통되는, 그래서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하는 소문의 잔치. 누구는 그 소문의 벽에 갇혀 울기도 하고 누구는 그 벽을 뛰어넘어 서동(緖童)이 되기도 하는 그 소문의 벽 앞에서 으앙 울어야 하나 찡그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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