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를 품은 서랍/ 박동덕
농기구 창고에 턱 버티고 앉은
헌 책상서랍 입이 무겁다
내가 먼저 열지않으면
-- 자로 다문 입 절대 열지않는다.
눈치도 없이 자리나 차지하는 미련퉁이
서랍을 뜯어내어 개집을 만들까
날도 추운데 확 군불이나 지펴버릴까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끌어내려 하자
말에도 씨가 있다며
무뚝뚝한 사내 입을 열었다
종알종알 지끌이던 말이 씨가 되어
후회해본 일 한두번이겠냐고
지난 해 모아두었던 꽃씨를
탁 뱉어낸다
오래삭힌 말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저 입은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말이 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붙박은 이 집까지
따라온 저 책상
서랍은 씨앗을 쓸어 담으며
꽃 피우고 싶다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처마밑에서 웅성거리던 겨울 바람
슬거머니 달아나고 있다.
시골에 사는 시인은 농기구 보관 창고를 자주 들락거리는 모양이다. 그럴 때 마다 가장자리에 자리를 넓게 차지한 헌 책상이 영 마음에 걸린다. 책상을 해체하여 개집으로 재활용을 할까, 그냥 작살내어 땔감으로나 쓸까 궁리를 하다가 일단은 밖으로 끌어내고 보자며 책상을 움직이는데, 약간 갸우뚱 하는 사이 그동안 굳게 닫혔던 서랍이 슬며시 열렸다.
서랍안에는 시인도 넣어두고 잊었던 지난 해의 꽃씨가 마치 말의 씨 처럼 흘러내린다. 여기서 시인은 헌 책상을 '무뚝뚝한 사내'로, 서랍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저 입'이라고 의인화 하면서 꽃씨를 뱉은 서랍을 두고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라고 치켜세운다.
아마도 시인은 지금의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누구라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듯이 '시골에 살고 싶다'고 수시로 노래를 불렀던 모양인데, 그 씨가 된 말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책상도 그 때 함께 따라 온 것 같다.
잠시 그 책상과의 인연을 돌아보면서 감상에 젖었겠는데, 당시에는 씨앗을 뿌리고 싶어도 '처마밑에 겨울바람이 웅성거리던' 계절이라 그럴 수도 없겠기에 다시 서랍 안에 씨앗을 넣어둔다. 물론 씨앗만 따로 보관하고 헌 책상은 마음 먹은대로 정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책상과 서랍은 서로 분리되지않은 한 몸이며, 씨앗은 서랍이란 입이 책임져야할 입 속의 말인 것이다. 그래서 '꽃 피우고 싶다'라고 말한 것은 씨앗이 아니고 서랍이었으며, 게다가 시인 스스로도 이들과의 인연은 함부로 방기해버릴 수 없는 것이란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상이 얼른 풀어서 읽히는 이 시의 스토리인데, 시의 전개 과정에서는 약간의 어섹한 비약도 엿보이고 잘 나가다가 중간쯤에서 부터 다소 혼선을 빗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중반부에 '오래삭힌 말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있다'라는 좀 생뚱맞은 메시지는 '기다림의 미학'이란 낱말의 관념성 때문에 다소 거슬리기까지 한다. '미학'이란 단어는 이런 잡문에나 어울리는 낱말이지, 시어로 쓰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그 대신에 서랍 안에 잠복된 꽃씨 알갱이 하나 하나가 소우주이므로 그 부분에 착안하여 후반부까지 긴장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박동덕 시인은 창녕 우포늪 근처에서 오로지 시만 생각하면서 하루를 매진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가끔 '시하늘' 행사 참여차 대구에 나들이라도 할라치면 갈수록 멋있어지는 그 '빈티지'(허접하다는 뜻은 절대 아님) 풍의 개성있는 스타일로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돌아간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잘나가는 한 시인의 멱살을 잡은 것과 동시에 다른 한 유명시인으로 부터 이단 옆차기를 당한 일이 있기 전에는 거의 말을 주고 받은 적도 없는데, 얼마전 간접화법으로 만약 돈 백만원이 생긴다면 나와 실컷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은 유효했으면 좋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눈먼 돈이 생긴다면야 더 신날 일이겠지만, 꼭 그렇지않더라도 내가 먼저 그 십분지일 돈 십만원 쯤 지갑에 꽂고 우포 나들이를 하고 싶다. 아니 하고 말 것이다. 가서 해질녘 막소주에 푸성귀 안주로 전을 펴고 과부 사정인지 홀애비 사정인지도 듣고 어쩌면 꽤 많은 코드가 맞지싶은 넋두리를 종알대면서 그 과묵한 사내 입 안에 들었던 꽃씨의 행방도 캐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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