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바람의 말 / 마종기

모든 2 2018. 5. 19. 14:53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1980>

 

 

 가지 떠난 마른 잎들이 허공의 빈 곳을 두리번거릴 때 쯤에야 비로소 나는 외로운 척 할 것이다. 그대 부정맥을 앓고있는 종아리 사이로 노란 모래 바람이 지나갈 때에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연립주택의 옥상 위에 걸린 흰 빨래가 신들린 무당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일 때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 될 때면 나도 외로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사무치지도 않고 건절하지도 않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잘가거라 '착한 당신'할 것이다. 봄나무 작은 나무가지 하나 소리없이 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