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중에서 -
시를 천천히 다 읽을 즈음 ‘사랑해서 미안해’란 트로트 노래의 곡조가 생각났다면 생뚱맞아도 한참 생뚱맞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가는 눈웃음까지 떠올랐다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거다. 어쨌거나 이 시를 다 읽고 나서도 ‘그대 바라보면 황홀해’라며 목청을 높이는 대목까지 진도가 나갔다면 감상의 방해를 넘어 고해성사 도중에 끼어든 각설이타령 격이다.
험난한 과정 다 겪고 유통기한 다 지난 뒤에도 너에게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의 마음 깊이 헤아리지 못해 미안하고,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고, 외롭게 해서 미안하고, 내 위로가 너무 가벼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한 사람의 사랑은 얼마나 힘겨울까. 그러나 사방을 온통 헤매다 다시 돌아와도 너 밖에 없는 그런 사랑 받는 이의 하늘은 또 얼마나 푸르고 빛날까.
그렇긴 해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한 여자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몇 번씩이나 고백하는 다른 한 남자 사이엔 필경 더 많은 곡절이 있어 보인다. 오래 전 어느 카드회사가 4,50대 남성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아내에게 가장 남기고 싶은 유언'을 물었더니 1위가 '미안하다'였고 2위가 '사랑한다'로 나왔단다.
여성들이 남편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사랑한다'라는데, 마지막 순간 아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에 앞서 '미안하다'라고 해야 하는 이 시대 중년 가장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순전히 개인사적 이유나 단지 호강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야 도리 없지만, 시대의 구조적 결핍과 시스템 탓에 기인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보면 새겨들어야할 사람이 꽤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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