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시인의 가을은/ 백형석
하늘을 베껴쓰다 절필한 늙은 시인
외출한 점을 불러 골골이 성을 쌓네
명치끝
숨은 강위에
울며읽는 연서로
너와의 싸움에서 백기를 들때까지
이마에 솟는 피로 청춘을 쓰다 보면
지나온
발자욱 까지
가을빛이 되는가
토하는 선혈보다 객기가 눈부시다
내 너와 어우러져 어깨로 취할것을
산 하나
옮겨논 뜰엔
온종일 술이 익네
울어도 눈물 없는 가을의 시인처럼
안으로 울고 있는 가을의 여인처럼
겉으로
늙어 가는가
목이쉬는 하늘아
- 계간 '시하늘'2004년 겨울호에서 -
생의 상처에 맞서는 강렬한 힘이 일상의 사소한 깨달음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시를 통해 유연하게 증명해 보였던 러시아의 예세닌은 27세 때 자신보다 17년 연상인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말았는데, 이후 죽음을 예견한 듯 예세닌은 ’안녕 내 친구’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잘 있거라 내 친구야/소중한 자네를 내 가슴속에 간직하려네/이별은 이미 정해진 것/저승에서 만남을 약속하는 것/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잘 있거라"(’안녕 내 친구’ 일부)
인생은 대충 생각하면 희극이지만 곱씹어 느낄 때면 자주 비극이 된다. 당연히 늙은 시인의 가을은 비극이 될 개연성이 크다. 시인의 사랑이 역광으로 비켜 치올려다 보이는 은억새의 군락처럼 슬프다. 얼핏 하얀 보푸라기가 눈이 부셔 아름답게도 보일 수 있겠으나, 속절없이 그 미학 공간은 비극적이다. 사랑이 남긴 흔적은 모두 갈색으로 변했다. 가을엔 바람도 갈색이다. 갈색은 곧 가야할 색이다. 우리에게 눈부신 저 단풍빛 조차 더 이상의 성장을 포기한 나뭇잎들의 장렬한 표현이다.
정형시조의 운율을 힘겹게(?) 단속하면서 써내려간 시인의 가을도 이제는 말을 아끼며 깊어져 간다. '하늘을 베껴쓰다 절필한 늙은 시인'앞에서 하늘도 목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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