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카프카의 희망

모든 2 2022. 2. 25. 06:45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그가 남긴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도 알 것이다. 그건 세상의 희망에 대한 에피소드다. 늘 세상을 어둡게만 바라보는 카프카에게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어느 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자네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카프카가 대답했다: “희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 하지만 그 많은 희망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네.”

 

이 아리송한 희망론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몇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부정적인 해석이 있다. 카프카의 말은 사실상 오늘 우리가 처한 어두운 희망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돌아보면 지금 여기의 현실 안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무수하고 곳곳에 편재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직시하듯 그 희망은 우리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희망들이다.

 

그건 소위 이미 체제 안에서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언론 종교 등등 제도화된 사회 곳곳에서 이미 철밥통을 옆구리에 찬 사람들을 위한 희망일 뿐이다. 더구나 그 희망은 오로지 그들만의 소유가 되고 세대를 건너서 계승되도록 구조화되어서 외부인들은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일종의 블록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외부인은 현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곳이 없으며 그 안에서 헬지옥, 탈조선 등등의 탈주 욕구는 오히려 당연한 절망이 되었다.

 

두번째 해석은 의지론적 해석이다. 현실이 그러하다면 희망은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주어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고 스스로 만들거나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지적 희망론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의지가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사적인 맹목성으로 왜곡되면 희망에의 의지는 오히려 열패감만을 화려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면 된다 식의 수많은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 스펙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강요된 유행, 얼굴은 물론 성격마저 성형하려는 거의 자해 수준에 가까운 자기개조의 쓸쓸한 시장 풍경이 그것일 것이다.

 

세번째 해석은 전투적 해석이다. 세상의 희망은 본래 모두의 것이었으나 누군가들만의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이제는 적극적인 투쟁을 거쳐서 그 빼앗긴 희망들을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회단체들, 노동단체들, 비판적 인문이론들이 곳곳에서 머리를 들고 저마다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는 건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이런 희망투쟁론은 앞선 두 희망론에 견주어 객관적 사실과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 고무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카프카의 희망론이 과연 여기에서 멈추는 것일까. 그는 누구나 알듯이 남달리 예민하고 예리한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자기가 살던 세상과 삶의 속살을 응시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무언가 위의 희망론들과는 다른 역설적 희망론을 앞서 소개한 에피소드 안에 감추고 있었으리라는 짐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역설적 희망론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말 그대로 역설적 발상을 통해서 엉뚱한 꿈 이론 하나를 만들어볼 수도 있겠다. 그건 우리가 저마다 꾸는 꿈과 희망의 주인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일이다. 즉 내가 꾸는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매일 밤 꿈을 꾸는 일도 나의 꿈을 꾸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나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늘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꿈들도 그 꿈을 누군가의 꿈으로, 우리 모두의 꿈으로 읽으면 그 어느 꿈보다 또렷하게 이해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엉뚱한 꿈 해석론을 빌리면 카프카의 희망론도 아주 정확하게 읽힌다. 즉 내가 찾는 희망은 그야말로 나만의 것, 내 가족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모르는 다른 이들의 꿈과 희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꿈을 꾸면서도 그 꿈이 꿈으로만 끝나고 마는 건, 우리가 그 꿈들을 오로지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꿈으로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 모두의 꿈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꿈을 꾸었던 정권이 물러난 자리에 새로운 꿈을 간직한 정부가 들어섰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높은 지지율은 분명 우리가 새 정부에 기대하는 꿈과 희망의 총량을 보여주는 지수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곳곳에서 그동안 빼앗겼던 꿈과 희망을 되찾으려는 움직임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카프카의 희망론을 되새겨야 할 때인지 모른다. 희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은 꿈의 권리가 주장될수록 기억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희망은 비로소 세상의 희망이 되고 더불어 나의 희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