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투표일 아침이 생각납니다. 고백하건대 그때까지도 저는 심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다른 후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투표 자체를 망설였습니다. 그 망설임은 지난 정치들로부터 받아들여야 했던 배신감과 모욕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 제도정치와 현실정치의 본질적 한계성에 대한 제 자신의 오래된 회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은 당당하게 대통령이 되셨지만 당신이 승리의 두 손을 번쩍 들었을 때에도 저의 회의는 여전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은 선물을 약속받은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간소하지만 진실해서 멋있었던 취임식, 단호하고 자신만만했던 취임사, 다정하고 편안했던 카퍼레이드, 곧이어 당신 스스로 발표하신 탕평인사 등등이 저의 회의와 우려를 일시에 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쁨이 크면 염려도 커진다고 했던가요. 지금 저는 그래도 남아 있는 몇몇 염려의 마음을 담아 당신께 이 편지글을 쓰고 있습니다. 부디 이 편지는 소심해서 근심 걱정도 남달리 많은 한 서생의 애틋한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선거에서 승리했듯 권력자가 된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시기를 빕니다. 가난의 체험을 가난에 대한 미움과 부자들에 대한 선망으로 바꾸어 기득권자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부역자가 되었던 지지난 대통령, 사적인 트라우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정치를 그 그림자에게 제물로 봉헌하고 말았던 지난 대통령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폐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하지만 사적인 감정의 유혹을 단호히 끊어내시고 끝내 정의롭게 적폐들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이제 오년 동안은 일체의 사인성을 버리고 오로지 공공성의 대표 권력주체로서만 존재하시기 바랍니다. 그 냉철함은 칼로 제 가슴을 베어내듯 힘겨운 일이겠지만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신 것이므로 당당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부디 진정한 민주 대통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국민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만 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무능력을 비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건 우리의 요구들에 대한 수동적 충실성만이 아니라 그 요구를 넘어서는 더 많은 것들을 당신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민주 대통령은 다만 국민들의 요구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충복의 도덕성으로 끝나서는 불충분합니다. 그는 국가와 국민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더 큰 소망을 발견하고 배우게 하는 능동적 권력주체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당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막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의 주관적 욕망을 국민들의 소망으로 착각하는 우는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열어 보이는 새로운 기획들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숨은 소망들과 일치해 동의를 얻을 때에만 당신은 진정한 국민의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부디 공적 합리성을 완결하는 대통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합리적 정치는 두 가지를 말할 것입니다. 하나는 합리적 제도의 절정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위에서 밑바닥까지 그 어떤 사욕들도 공권력에 기생할 수 없도록 페르시아 양탄자만큼이나 촘촘해서 아름다운 국가 시스템을 직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공적 제도 권력이 결코 개인과 시민사회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제도 권력의 책임과 의무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사회의 기본조건들을 튼튼히 구축하는 일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물적으로 심적으로 안전하게 제반공사가 완결된 사회의 지반 위에서 저마다 개성과 자유의 집을 지으며 삶을 만들어나가는 건 온전히 시민적 자율성의 몫이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제도권의 권력이라는 것, 그 권력은 제도의 완결성을 실현하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느낌의 정치력도 갖추시기 바랍니다. 제도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포괄적이어도 태생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제도가 완전해도 그 안에 함께 담기고 내포되지 못하는 것들, ‘신들도 눈감고 지나치는’(토머스 핀천) 일들과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 늘 있다는 걸 결코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그렇게 끝내 소외되고 배제되는 제도권 주변부의 것들을 잊지 않고 매만지는 예민하고 따뜻한 감성의 정치력을 함께 갖추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디 칭찬들에는 경계하고 비판들에는 관대하시기 바라며 또 한 번 진심으로 대통령님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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