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두리번거리기

모든 2 2022. 2. 25. 06:25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목이 아프다. 상하좌우 마음대로 고개를 가눌 수가 없다. 정형외과에 갔다. 의사는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책 보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했더니 그런 줄 알았다는 듯 웃고 나서 처방전과 함께 충고도 준다. 인체 중에서도 목은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머리는 너무 무거워서 목뼈는 늘 지나친 하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 고개를 바로 들고 눈앞과 좌우를 둘러보며 지내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늘 고개를 꺾고 몰두하면서 살도록 되어서 죄 없는 목이 고통과 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을 숙인 채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자주 고개를 바로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정말 근자에 목뼈를 너무 혹사했다. 먹고살아야 해서 목을 꺾고 책 보는 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어지러운 시국 탓에 눈을 바닥으로 떨구고 로댕 조각품의 흉내를 내었던 일도 많았겠지만 그 때문만도 아니다. 정작의 이유는 때만 되면 들여다보곤 했던 매체 공간들 때문이다. 국가대범죄의 시국이 막을 열던 때부터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커튼이 내려지는 지금까지 매체들 안에서는 갖가지 정치 수다의 잔치가 갈수록 가관으로 펼쳐진다. 티브이, 신문,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막론하고 소위 정치 논객, 법 전문가, 문화 비평가, 심리학자, 방송인, 심지어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밀입국자처럼 넘나드는 성직자 등등의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시국 분석과 시국담에 열을 올린다. 짐짓 진지하지만 사실은 풍문과 선정에 열광하는 정치 잡설의 난장은 멈출 줄 모른다. 더욱 볼썽사나운 건 그 안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권력을 방어하고 옹위하던 이들, 그 덕으로 한자리를 누렸던 이들, 정치현실에 나 몰라라 눈감은 덕에 부패한 정세로부터 사적 이익의 추수를 거두었던 이들도 어느 사이 명패와 얼굴을 바꾸고 버젓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간 그동안 그런 저잣거리의 객설과 농담들에 너무 관심이 많았다. 너무 자주 오래 목을 꺾고 화면과 액정판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목뼈가 고통을 못 이겨 호소한다. 그만하라고, 이제 그만하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두리번거리라고….

 

고개를 바로 들고 두리번거리면 보이는 게 참 많다. 깨끗한 아침 하늘도 보이고 공원 산책로의 싹 트는 풀들도 보이고 노란 유치원 버스와 해맑게 웃으며 손 흔드는 아이들의 얼굴도 보인다. 그러나 슬프고 아픈 것들도 보인다. ㄱ자로 허리가 굽은 우리 동네 노파는 오늘도 아침부터 폐지를 수집하고, 늦은 밤 전철역 노변에 통닭구이 푸드 트럭을 세워놓은 아저씨는 오늘도 막막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어젯밤 종강 뒤에 함께 술 마시던 청년은 취기에 젖은 목소리로 애써 숨겼던 불안과 우울을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목전의 것들을 넘어서 벌써 잊혀가는 얼마 전 과거의 얼굴들도 보인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보이고, 아이들을 구하려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침몰해버린 어느 잠수사도 보이고, 물대포 공권력의 폭력으로 두개골이 파열되어 조용한 노년의 삶을 빼앗긴 어느 늙은 농부의 얼굴도 보인다. 더 멀리 눈을 들어 두리번거리면 심지어 오래고도 오래된 과거의 사람들도 보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오늘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권력, 음험한 음모,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망각의 강 저편으로 떠내려가 버린 수많은 익명의 얼굴들도 보인다.

 

고개를 바로 들고 욕스러운 시국의 곳곳을 두리번거리는 일이 필요하겠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도 또렷해진다. 그건 대통령을 탄핵하고 서둘러 새 대통령을 빈 의자에 앉히는 일만은 아니다. 국가대범죄의 도당들에게 마땅한 형을 치르게 하고 다시는 공권력의 누수가 없도록 제도를 수선하는 일만도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여기의 현장을 넘어서 그때 거기의 먼 과거까지 정치사회적 범죄의 수많았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지나갔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정치적 현장이 지금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은 승리했지만 그 광장의 정당한 주인은 아직 거기에 입주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새로운 시국은 열렸지만 그 시국을 변혁으로 밀고 나갈 정치적 주체는 아직 제 얼굴을 찾지 못했는지 모른다. 목전의 목표 달성과 미래의 전망에만 초점을 맞추는 안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날의 희생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정치적 먼 시선의 주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주체는 고개를 바로 세우고 세상과 역사의 먼 곳까지 예민하게 두리번거리는 주체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