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어느 후배의 투병

모든 2 2022. 2. 25. 06:13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보신의 도구로 전락한 특권들이 어떻게 부메랑의 칼날이 되어 그들의 삶에 복수하는지를 보는 일은 오래된 종양으로 가득한 세상의 속살을 목격하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들의 불행은 누리던 특권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야 할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가엾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리라.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지난주 오랜 동안 투병을 하고 있는 후배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근자에 더 병세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그런데 지금은 병원마저 떠나서 집에 머무는 그의 얼굴과 태도는 내내 편안하고 밝았다. 오래전 유학 중에 알게 된 그는 늘 그렇게 밝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삶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었다. 유학 중에도 남달리 생활이 어려워서 온갖 허드렛일들로 생활과 공부를 감당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행히 몸이 남달리 건장해서 많은 어려움들을 거뜬히 치러내곤 했지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특별한 성품은 튼튼한 몸이 아니라 또 다른 힘 때문이라는 걸 병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건 그의 성실함과 온화함이다. 그는 많은 어려움 앞에서도 늘 주어진 생활에 성실했고 불만 대신 친절함으로 힘들게 다가오는 다반사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 투병의 위기 앞에서 이전의 건장한 몸을 잃었지만 그런 그의 인격은 여전해서 많이 놀라웠다.

 

다녀온 뒤에는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이 한생을 지나가는 일, 태어나 살고 죽는 일은 뭘까, 라는 속 깊은 질문도 더 무게를 얻고 진지해졌다. 흔히 항간에서는 이렇게 회자되곤 한다, 사람은 한생을 살다가 떠날 때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라고. 그러니 애써 욕심에 시달리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과연 그러할까. 사람이 정말 그렇게 덧없는 소멸의 존재일 뿐일까. 사람의 한생이 몸과 혼으로 지어졌다면, 그 생이 마감될 때 몸도 혼도 다 빈 것이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일까. 나 역시 그런 줄 알았지만 후배를 보니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몸은 타고나와 소멸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살면서 지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혼 또한 태어날 때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길러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한생을 사는 건 자기의 몸과 혼을 만들어 완성하는 일이고 그렇게 생을 통해서 지어진 몸과 혼을 합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부르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때가 되어 생을 떠날 때 우리는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든 저마다의 인생을 봇짐으로 들고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속된 이승이야 있건 없건 별 무관일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보상으로 교환될 수 없도록 귀중한 것, 한 사람이 평생을 지어 만들어 갖게 되는 저만의 인생일 테니까.

 

시국이 흉흉하다. 물론 그 흉흉함은 지금 사회의 모든 공적 영역들이 드러내는 뿌리 깊은 부패의 치부들 때문이다. 그 적폐들을 이번에는 잘라내고 고치겠다며 저마다 명함을 내밀면서 앞으로의 정세를 정략적으로 저울질하는 이들의 제스처도 의심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눈을 조금 더 깊게 해서 바라보면 흉흉한 시대의 까닭은 더 본질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건 되어가는 시대와 세상이 한 사람의 삶을, 자기 몫의 인생을 만들고 지켜가는 당연한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세상의 틈새를 엿보며 권력에 기생했던 이들의 삶이 결국 어떤 모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가를 표본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지금 줄지어 푸른 수용복을 입고 있는 특권적 사람들의 몰골일 것이다.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보신의 도구로 전락한 특권들이 어떻게 부메랑의 칼날이 되어 그들의 삶에 복수하는지를 보는 일은 오래된 종양으로 가득한 세상의 속살을 목격하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들의 불행은 누리던 특권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야 할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가엾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리라. 그에 비하면 투병 중인 후배의 모습은 더욱 소중해 보인다. 힘든 병중에서도 여전히 정직함과 온화함을 지키는 그의 모습은 비록 위기에 처했지만 지니고 가게 될 인생이라는 봇짐을 더 성실하게 마련하려는 노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잘 웃던 그녀가 세상에 없으니, 이 세상도 조금은 더 쓸쓸해질 거야’ - 일본의 어느 시인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뒤에 이런 시 한 줄을 남겼다고 한다. 살만하지 못한 세상에서 산다는 건 긴 투병생활을 하는 건지 모른다. 생의 위기 앞에서도 평소의 정직하고 온화한 모습을 잃지 않는 후배는 그 투병이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인가, 내게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처럼 소중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왜 그만일까. 흉흉한 세상 속에서도 제 몫의 인생을 묵묵히 만들어가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이 흉흉하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그 얼굴들을 나날이 잊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