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미물들의 권력

모든 2 2022. 2. 25. 06:09

미물들의 권력은 모른다의 뻔뻔함과 심문자들의 무능력 덕분으로 이번 경우에는 청문회의 시험대를 큰 탈 없이 속여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겁하고 가련한 미물성의 육체는 결국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들키고 말 것이다. 아무리 음험하고 노회하더라도 미물성의 권력으로는 끝까지 속일 수도 막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과 진실의 힘이기에.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작은 갑충 한 마리가 방바닥을 빠르게 기어간다. 슬쩍 건드리니까 돌연 딱딱하게 몸을 움츠리고 정지해서 꼼짝도 않는다. 갑충은 지금 절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자기는 죽었다는 것, 더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니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몸짓 신호는 거짓말이다. 갑충은 정말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 짐짓 죽은 시늉을 하는 것이다. 자연조건 속에서 힘없는 것들은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삶과는 전혀 반대의 것, 즉 죽음 속으로 도피한다. 이것이 헐벗은 미물들의 육체가 알고 있는 가엾은 생존 전략이다.

 

그런데 이 미물들의 육체가 갑자기 강자의 육체를 흉내 내는 경우가 있다. 그건 그 미물들이 권력을 얻었을 때이다. 미물들의 권력은 자기의 권력이 무엇을 위해서 쓰여야 하는지를 모르면 안에 쌓여 있는 원한 때문에 폭력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강자 논리만을 배워서 알고 있는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자들이 보여주는 권력의 양상들이다. 미물들에 지나지 않는 그들은 모처럼 얻은 권력에 의존해서 자신의 사이비 강함을 드러내고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약자들에게 동질적 연대감을 느끼는 대신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면서 그 약자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본성은 여전히 미물성이다. 그 미물성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건 권력이 그들을 떠났을 때이다.

 

청문회에 대한 항간의 실망이 크다. 원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라는 패러디 속담처럼 전대미문적인 국가 대범죄의 정치적 속살들을 보게 되리라는 긴장과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불려나와 심문당하는 이들은 노련하고 노회한데 소위 심문을 하겠다는 이들은 논리도 전략도 없이 가진 건 무지스럽고 속 빈 강정 같은 호통들뿐이었다. 피심문자들의 속살은커녕 심문자들의 속살, 소위 이 나라의 민의정치를 대리한다는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의 일천한 지력과 정교하지 못한 추리력을 적나라하게 들켰을 뿐이다. 하지만 청문회를 다른 시선으로 응시한 사람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훔쳐보았을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의 말이 아니라 몸짓에 주목하면서 피심문자들의 속살을 훔쳐보는 관상학적 시선이다.

 

우선 청와대의 영의정이었던 김기춘 비서실장을 보자. 죄 없었던 이들의 ‘아니요’라는 정직한 대답을 노련한 공작 기술력으로 수없이 뒤집어버리면서 아니요라는 답변이 얼마나 힘센 것인지를 배웠던 걸까. 아니다, 모른다, 기억 안 난다, 라는 철갑의 거짓말 옷을 입고 그는 수많은 질문을 여전히 차가운 마스크의 얼굴로 능숙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내내 집요하게 모른다던 최순실과 함께 찍힌 동영상이 나왔을 때, 그는 돌연 무엇이 되었나. 저도 이제는 늙어서, 늙다 보니 그만 기억력이 희미해져서…, 모른다 대신에 더듬거리며 입 밖으로 뛰어나왔던 이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그건 미물의 육체성이다. 강자의 권력만을 알았던 그가 돌연 미물성의 육체 안으로 꼬리를 감추며 죽은 시늉을 한다. 미물처럼 힘없었던 약자들에게 평생 가혹한 강자로 군림했던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

 

또 전자와 짝패를 이루면서 청와대의 좌의정 역할을 했던 우병우 민정수석을 보자. 마지못해 마지막 청문회장으로 소환되어 증언대에 섰지만 그때까지 그는 한 달이 넘도록 투명인간 행세를 하며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가 꽁꽁 제 몸을 숨겼던 은신처는 어디였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직접 전달이 안 되면 동행명령서도 소용없다’는 알량한 법조문 속, 아마도 그가 인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한 이해 공간이며 그 맹목성과 무지 덕으로 일찍부터 권력과 부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법의 틈새였다. 그 법을 이기적 권력으로 사유화하면서 수많은 이들을 그 속으로 잡아들였겠지만 이제는 그가 스스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기를 감금하는 신세가 되었다. 앞이 캄캄하도록 제 눈만 감으면 안전하다고 믿는 어리석은 꿩처럼 가엾은 미물의 육체를 그 안에 숨기고 죽은 시늉을 하면서….

 

미물들의 권력은 모른다의 뻔뻔함과 심문자들의 무능력 덕분으로 이번 경우에는 청문회의 시험대를 큰 탈 없이 속여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겁하고 가련한 미물성의 육체는 결국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들키고 말 것이다. 아무리 음험하고 노회하더라도 미물성의 권력으로는 끝까지 속일 수도 막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과 진실의 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