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검찰은 마침내 백남기 농민의 사체에 대한 부검영장을 얻어냈다. 이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분명 곰팡이의 시선을 닮았다. 그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아직도 쓸모가 있는,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
얼마 전 사진 비평문 하나를 썼다. 어느 사진 상을 받은 모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였다. 그 사진의 오브제는 곰팡이다. 작가는 사람의 두상을 석고로 제작한 다음 그 위에 습지를 바르고 다양한 곰팡이 균들을 배양해서 그 생태를 영상으로 포착했다. 워낙 독특한 이미지여서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 나름 고민을 많이 한 끝에 나는 죽은 것들을 응시하는 시선이라는 주제와 내용으로 긴 비평문을 쓸 수 있었다.
곰팡이의 생태적 속성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곰팡이는 무성생식을 한다. 다른 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혼자서 자기를 분열시키면서 더 많은 자기들만을 무한히 증식시킨다. 또 곰팡이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다른 유기체에 기생해서 그것의 습기와 유기성분들을 자기의 영양분으로 바꾸어 살아간다. 그래서 곰팡이는 빛이 없고 습한 곳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부식작용이 일어나는 사체들을 좋아한다. 물론 유용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모든 곰팡이가 사람에게 해로운 건 아니다. 건강 제일의 식품으로 알려진 다양한 발효식품들은 곰팡이의 생태가 없다면 누릴 수 없는 자연의 혜택이다.
그런데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바라보면 곰팡이는 또 다른 점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다. 특히 곰팡이의 시선이 그렇다. 곰팡이는 사체를 사체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라고 규정하는 그것들을 여전히 살아 있는 유기물로 보고 거기에 기생한다. 그런 점에서 곰팡이는 무생물들 안에서도 영혼을 읽고자 했던 태곳적 애니미즘의 시선을 닮았다. 하지만 곰팡이의 시선은 놀라워도 사실은 자기밖에 모르는 시선이다. 곰팡이는 사체에서 영양분을 발견하지만 그건 다만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것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곰팡이만의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람의 시선, 더 정확히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잃었어도 사랑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애도의 시선이다. 애도의 시선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보존하려고 한다. 그래도 애도는 언젠가 끝나야 한다. 생은 슬픔과 기억보다 엄중해서 또 다른 사랑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애도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건 상실이 억울한 때이다. 그 사람의 죽음이 부당할 때이다. 그때 사랑은 멈출 수 없고 애도 또한 불가능해진다. 불가능한 애도는 상실당한 사랑의 대상을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으로 중단 없이 응시한다. 사랑-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힘이다.
백남기 농민이 지난주 숨을 거뒀다. 삼백십칠일 동안 코마 상태로 지내다가 마침내 의학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의 육체는 세 단계를 거쳐서 사망의 육체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땅을 사랑하는 농민, 의식이 깨어 있던 한 사인의 육체였다. 다음에 그는 거리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다가 물대포 직사라는 공권력의 폭력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내팽개쳐진 공인의 육체였다. 그다음에 그는 두개골 파열로 의식을 빼앗긴 코마의 육체였다. 그리고 이제는 남겨진 시간을 다 보내고 텅 빈 사체가 되었다. 그런데 그를 사체로 만든 공권력이 다시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을 때처럼 다시 그의 육체를 거두어 가려고 했다. 부검이라는 사체 소유권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은 마침내 백남기 농민의 사체에 대한 부검영장을 얻어냈다. 이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분명 곰팡이의 시선을 닮았다. 그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아직도 쓸모가 있는,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유족의 시선, 밤새워 함께 병원을 지키는 익명의 시선들이다. 그들의 눈에도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사체는 살아 있고 또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지켜져야 하는 그 무엇이 그 안에 있다. 그것은 또 무엇일까. 하기야 이런 질문은 물을 필요도 없다. 곰팡이가 아니고서야 그걸 모르는 사람의 눈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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