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이 왜 정신질환자들과 노숙자들뿐일까. 어느 부랑인들은 감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탈북자들은 보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지적장애자들은 엉뚱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사라지고,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은 바다 밑으로 사라져서 지금도 돌아올 줄 모른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이 주일에 한 번씩 지방 강의가 있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기차를 타기 전에 커피 한 잔 뽑아들고 광장에 서 있으면 거의 매번 서성이던 이들이 다가와서 담배나 푼돈을 요구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늘 분홍빛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꼭 안고 광장을 배회했다. 말도 건네지 않고 달라는 것도 없이 묵묵히 우울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뜻없이 서성이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궁금했지만 곧 잊었다. 그렇게 나와 상관없는 것들은 저절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나에게 당장 중요치 않은 것들은 자동기능처럼 삭제되어 까맣게 지워진다. 어쩌겠는가.널리 알려진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그가 직접 겪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증언서이다. 끔찍한 증언들이 많지만 그중에는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생존의 몸부림에 대한 보고들도 있다. 어떤 이는 남다른 노동력으로, 어떤 이는 처세술이 뛰어나서, 어떤 이는 악독한 팀장이 되어 살아남는다. 레비 자신은 지식인이어서 살아남았다. 자기는 화학자였고 실험실 작업을 도울 수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렇게 모두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이에 또 누군가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고….
노숙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비밀이 아니다. 광장과 지하도 안을 배회하던 누군가가 자고 나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모르는 이를 따라가서 사라진다. 일종의 사람 거간꾼들에게 수집되어 재활용품처럼 정신재활병원으로 수용된다. 정신재활병원은 그들을 수용하고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머리당 건강급여금을 수금한다. 무산자의 육체인 그들의 몸이 거기에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매해 수억씩 돈을 가져다주고 그렇게 돈이 되는 한 그들은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소위 정신재활병원은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재활과 사회복귀의 권리를 다시 부여받는 치유기관이 더는 아니다. 거기는 시장사회 전체가 그렇게 기능하듯 누군가의 자본축적을 위해 불특정 다수들이 감금당하고 착취당하는 또 하나의 수용소일 뿐이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감금된 이들이 안에서 조차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어느 날 사라진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정신재활병원에서는 사라진 이들이 왜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어쩌다 우연처럼 터지는 폭로들 덕분에 잠깐 실상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고발되었던 어느 기관은 이름을 바꾸어 지금도 수용소 장사를 한다고 어느 방송매체는 보도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이 왜 정신질환자들과 노숙자들뿐일까. 어느 부랑인들은 감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탈북자들은 보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지적장애자들은 엉뚱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사라지고,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은 바다 밑으로 사라져서 지금도 돌아올 줄 모른다. 오늘도 무심히 해가 뜨고 지는 사이 또 누군가들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기척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듯이 시끄럽게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다. 일거에 큰돈을 벌어들인 전관들도 나타나고 최고 권력자의 어두운 총애를 받는 청와대의 일급수석도 나타난다. 재벌의 총수도 음란 비디오 속으로 나타나고 집권당의 실세들도 휴대폰 녹취록 속에서 나타난다. 앞으로 더 많은 성공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권력과 부의 메달을 걸고 또 나타날 것이고, 잠깐 세상에 얼굴을 들켰던 그들은 다시 성업 중인 재활병원처럼 또 얼굴을 바꾸어 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안전하게 귀환할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그들과 자취 없이 사라지는 저들과의 사이에는 정녕 아무 관계가 없는 걸까. 노숙자 여인과의 사이에 이어진 모종의 인연을 아무래도 내가 부정할 수 없듯이 그들과 저들 사이에도 은밀하게 짜인 구조적 악연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다만 묻지 않으므로 모를 뿐이고 모르는 사이에 또 누군가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에 누가 남고 무엇이 남게 될까.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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