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조용히 술 마시는 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의 방이다. 또 하나는 외로운 사람, 버려진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방이다. 승리자인 권력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희생자인 시인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어느 젊은 검사가 세상을 버렸다. 이 소식은 듣는 사람을 슬프면서도 놀라게 한다. 남다른 미래를 보장하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던 젊은이는 왜 세상을 버렸을까. 그는 몇 줄의 글을 유서로 남겼다. 업무가 너무 많았다고, 조직의 압력이 너무 무거웠다고 그는 적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직속상사의 무례한 행동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안에는 이런 고백도 있다. 어느 날에는 동료 검사의 결혼식이 있었고, 상사 검사는 그에게 ‘조용히 술 마실 수 있는 방’을 구해놓으라고 지시했고, 그는 수소문을 했지만 힘들다고 보고했고, 그는 야단을 맞았고, 그 야단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후에도 이어졌다고. 유서는 특별한 글이다. 살아서 쓰는 글들은 거짓말을 해도 유서 안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미래에의 끈을 놓을 때 삶은 더 이상 위장의 베일이 필요 없고 그래서 마지막 글 안에는 진실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젊은 검사의 유서 안에도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진실은 언제나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적힌다. 그래서 진실은 어쩌면 가장 사소한 문장 속에 암호처럼 들어 있기도 하다. 젊은 검사의 경우, 내게는 그 진실의 문장이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이라는 사소하면서도 비밀스러운 한 구절로 여겨진다. 그런데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은 어떤 방일까.
조용히 술 마시는 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의 방이다. 권력은 조용히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이때 ‘조용히’는 은밀하게다. 은밀한 조용함은 그런데 조용하지 않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늘 더 있다. 그것이 또 다른 권력이든 그 권력이 필요한 자이든 또 권력의 피곤을 달래주는 누군가이든 그 방에는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더 있다. ‘술’ 또한 술이 아니라 다른 무엇들의 기호다. 그 기호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내용은 타락한 권력이 안에 숨기고 있는 다양한 속살들이다. 그래서 술은 권력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고 쾌락이기도 하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이 술들은 서로를 권하면서 세상을 ‘술 권하는 사회’로 만든다. ‘방’ 또한 다만 방만이 아니다. 그 방은 은밀하지만 사실은 오염된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는 방, 권력이라는 시스템 자체다. 워낙 공고하고 치밀한 이 시스템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안에서도 작동하는 자동기계와 같아서 이번 경우처럼 내부의 희생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방은 한 권력자의 밀실이나 특별한 권력 조직의 내부공간만이 아니다. 그건 공공성을 위해 주어진 권력들이 사유화되고 그 정의롭지 못한 권력들이 횡행하는 구조에 대한 보편명사다. 이 구조 안에서 희생자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이 있다. 그건 외로운 사람, 버려진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방이다. 그 방은 진공 속처럼 조용하다. 그 방에는 오로지 혼자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방에는 한 잔의 술이 있다. 그 술은 혼자 마시는 외로움의 술이다. 그리고 그 방은 어쩌면 마침내 떠나야만 하는 방이다. 거기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방에서 외로움을 마시다가 방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체코의 시인 파울 첼란도 있다. 아우슈비츠라는 잔혹한 권력기계의 세상에서 홀로 방을 지키던 그는 외로운 술 같은 몇 줄의 시를 남기고 자기의 조용한 방을 떠났다. 제목마저 없는 그 시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외로움과 와인 곁에서/ 두 기울음 곁에서 내 어깨도 기우네/ 그대는 듣는가 흰 눈밭 속으로/ 저 먼 곳 노래 부르는 신이 있는 곳으로 내가 달려가는 소리를/ 세상의 울타리를 넘어서 달려가는/ 나의 마지막 걸음 소리를”(파울 첼란, <외로움과 와인 곁에서>)
승리자인 권력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희생자인 시인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부장검사는 권력의 중앙으로 승진하고 시인은 밤의 센강으로 간다. 첼란은 1970년 늦은 봄의 어느 밤 홀로 와인을 마시다가 센강을 찾아가 몸을 던졌다. 하지만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떠나 어느 다른 방으로 건너간 이들이 왜 아우슈비츠의 시인뿐일까. 그들 모두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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