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앞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로 되돌아가려는 맹목적 자연의 핏줄, 그 맹목적 핏줄에 기생하는 어두운 오컬티즘의 핏줄, 그 검은 심령주의에 기생하는 정치권력들의 음험하고 교활한 핏줄들이 서로 수혈되고 유착되는 무당 판이 작금의 현장이다. 야만에게 빼앗겼던 핏줄의 권위를 지키면서 극복하는 또 하나의 핏줄이 필요하다. 지금 거리로 모여 이어지는 민주의 촛불들이 그것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우리는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명은 자연과 역사의 관계다. 그 둘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문명은 야만이 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자연과 역사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생명 현상이다. 그 둘은 모두가 핏줄이다. 자연과 역사가 핏줄이라는 건 그 둘이 모두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걸 말한다. 그런데 그 핏줄의 혈액은 엄중하게 다르다. 자연의 혈액은 맹목적으로 흐르지만 역사의 혈액은 합목적적으로 흐른다. 합목적적이란 그 목적이 특별한 누군가나 집단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합당한 공리적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 합목적성이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만든다. 그리고 가장 객관적이며 공리적인 주권적 제도가 성립되면 그것이 근대국가다. 국가는 제도지만 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핏줄과 이성을 가진 살아 있는 유기체다. 우리는 모두 그 국가의 합목적적 생리와 이성을 믿었기에 그것을 삶의 광장으로 선택하고 그 광장이 모두를 위한 합리적이고 공리적인 광장이 되도록 애쓰고 또 애써 왔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국가는 무엇이 되었나. 국가라고 믿었던 광장이 놀랍게도 야만과 광기의 굿판임이 밝혀졌다. 그것도 저잣거리의 민간 미신이 벌이는 사적 굿판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가 주동이 되어 제도권의 무당들과 제도 밖의 무당들이 청와대라는 나라의 중심에 솟대를 꽂고 권력과 부패의 칼춤을 추었던 온 나라의 굿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굿판이 이전의 부패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곳곳에 은신한 야만의 핏줄들이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춤판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해졌다. 민주국가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욕보인 이 국가 대 범죄의 굿판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어두운 핏줄들의 굿판은 크게 세 개의 반민주적 핏줄들이 상호기생하면서 조직적으로 기획해낸 국기모독의 시스템이다. 역사는 앞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로 되돌아가려는 맹목적 자연의 핏줄, 그 맹목적 핏줄에 기생하는 어두운 오컬티즘의 핏줄, 그 검은 심령주의에 기생하는 정치권력들의 음험하고 교활한 핏줄들이 서로 수혈되고 유착되는 무당 판이 작금의 현장이다. 이 핏줄들은 모두가 합목적적이며 민주적인 공동체에 기생해서 그 공리적 혈액을 보신과 이기를 위해 제 몸 안으로 흡혈하려 했던 반민주적인 핏줄들이다. 이 핏줄들의 혈압은 그 사이에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오랫동안 경화된 그 비대한 혈관들이 이제 내파되어 일어난 전신마비의 국가적 뇌졸중 상태가 지금 눈앞의 현실이다.
그러나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건 핏줄들의 동맥경화는 비단 정치권력들의 병리적 현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돌아보면 오늘의 사회영역들은 모두가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핏줄들의 경화증을 앓고 있다. 제 것도 아닌 자본을 자식들이 불법 상속으로 나누어 갖는 재벌들, 시장과 정치와 결탁해서 학문과 비판정신의 전당을 시장주의와 순응주의의 온상으로 만드는 교육기관들, 시청률이라는 사이비 척도를 앞세우며 핏줄 막장 드라마와 이벤트성 뉴스들을 양산하는 방송사와 언론들, 미적 저항은커녕 국가 보조금에 빌붙은 공공단체를 사조직화해서 경제적 성적 착취에 탐닉하는 문화예술단체들, 오래된 과거와 사적 이해관계의 그림자 속에서 합목적적 역사의 궤도를 달려가려는 시대의 열차에 후진 기어를 당기는 엘리트 그룹들, 나아가 맹목적 핏줄 이기주의를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착으로 가장하는 자본주의 프티 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들이 그 맹목적이고 야만적인 핏줄의 얼굴들이다. 이 오래되고 낡은 핏줄들의 주술권으로부터 나와야 할 때다. 게다가 지금은 나와서 달려갈 곳이 눈앞에 열려 있다. 그것이 새로운 파토스의 혈액처럼 촛불들이 모여드는 시위의 거리와 광장이다.
핏줄은 소중하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핏줄에 매일 때 핏줄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야만이 된다. 그동안이 그 야만의 시대였다. 야만에게 빼앗겼던 핏줄의 권위를 지키면서 극복하는 또 하나의 핏줄이 필요하다. 부르지 않았어도 지금 거리로 모여 이어지는 민주의 촛불들이 그것이다.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이 파토스의 핏줄에게 더 많은 혈액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많아도 충분치 않은 수혈, 지금 필요한 건 그 수혈을 위한 헌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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