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론이든 선의정치론이든 그 낭만적 정치는 결국 오래된 구습인 위로부터의 정치일 뿐이다. 이제 도래해야 하는 새로운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여야 한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다. 과거의 권력들, 그 권력들이 저지른 불행들, 그 불행의 희생자들이 기억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영웅 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대선 정국 안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의 기세가 거세다. 그 기세의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는 그가 앞세우는 ‘새로운 정치’라는 이슈도 있다. 하기야 새로운 정치라는 슬로건은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오래된 농담 같은 메뉴이기는 하다. 새로운 정치의 구현을 약속하지 않았던 대권 후보가 언제 있었던가. 그런데 안 지사의 경우 이 낡은 메뉴가 다시 주목을 끄는 건 그 새로움의 내용이 자못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신선함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연정론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정치론이다. 그런데 이 두 정치론은 과연 새로운가.
먼저 대연정론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자. 안 지사가 제안하는 대연정 아이디어 안에는 물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 있다. 그건 이 나라의 근대정치 초창기부터 정치 공간을 구습과 적폐의 온상으로 만들어온 정치적 질병이다. 모두의 공익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사익을 추구하는 당파적 이권 투쟁으로 점철되어온 파당과 불화의 정치적 진흙탕 싸움질이 그것이다. 안 지사는 이 소모적 싸움은 이제 그만두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대연정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연정론 안에는 간과할 수 없는 구태정치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듯 보인다. 안 지사는 화해의 정치를 앞세우며 대연정을 호소하지만 그 대연정의 파트너는 누구인가. 그건 지난 정권의 권력자들, 작금의 정치적 비상사태를 불러들인 장본인들, 그럼에도 여전히 오래된 권력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당파와 세력들이다. 이들과도 연대하자는 대연정 아이디어 안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런 유의 대연정은 결국 강자였던 이들과 이제 강자가 될 수도 있는 이들 사이의 연정, 말하자면 오래된 강자들 사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강자게임의 정치가 오늘의 국가적 비상사태를 불러들인 정작의 구태는 아니었나. 또 그러한 강자게임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 건 무엇인가.
다음으로는 선의의 정치론이다. 물론 모든 정치적 악덕들을 착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복음 정치가 안 지사의 진의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요지는 의도와 행위를 분명히 구분하자는 것, 정치적 의도는 선의로 받아들이지만 그 행위의 위법성은 철저하게 단죄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선의와 위법이라는 두 개념이 과연 그렇게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그 둘이 구분된다면 안 지사의 논리, 요컨대 ‘선의였지만 아쉽게도 위법이 되었고 위법이었지만 의도는 착했다’라는 명제는 무리 없이 성립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두 개념을 배와 등처럼 서로 나뉠 수 없는 쌍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명제는 다만 형식 논리적 결과일 뿐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두 개념이 하나의 사안일 때 결과는 정반대의 명제, 즉 ‘선의라면 위법일 수 없고 위법이라면 선의일 수 없다’라는 명제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안 지사의 논리적 오류는 무엇보다 그 논법의 주체에 대해서 착각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의와 위법을 판단하는 기준은 사안 그 자체이지 그 사안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안이 잘못되었다면 그건 선의가 아니었던 것이고 그것이 선의였다면 법을 위반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안 지사의 논리적 오류는 나아가 안 지사가 정치보다 정치가를 앞세우는 영웅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는 다름 아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정치적 영웅주의가 만들어낸 독단의 결과는 아닌가. 정치는 정치가가 좌우하는 그런 주관적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가를 구속하는 엄중하고도 객관적인 영역이 정치다. 정치가는, 이 정치의 객관성을 보호하고 수행하는 특별한 직업인, 막스 베버를 빌려 말하자면, ‘소명의 직업인’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안 지사가 기획하는 정치가 여전히 낭만적 정치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연정론이든 선의정치론이든 그 낭만적 정치는 결국 오래된 구습인 위로부터의 정치일 뿐이다. 이제 도래해야 하는 새로운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여야 한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다. 과거의 권력들, 그 권력들이 저지른 불행들, 그 불행의 희생자들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 기억들이 모두 응집된 곳이 정치적 ‘현실’이고 이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잡는 것만이 새로운 정치다. 민주주의는 영웅 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다.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 시민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름없이 소외된 타자들의 정치다. 이 타자들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며 끝이고 더불어 미래의 정치가 된다. 과거와 타자들을 기억하는 시대만이 미래 또한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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