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가난했던 전임 대통령이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대학조차 포기했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가판대를 메고 다녔다는 사람이다. 그들이 지녔던 가난의 도덕은 영 달라 보인다. 니체의 분류를 빌리자면, 전자는 주인의 도덕주의자였고 후자는 노예의 도덕주의자였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가난하면 인색해지고 인색하면 수전노가 된다. 한때 세상은 수전노의 삶이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꿈꾸었지만 그 꿈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온 세상에 자본이 넘치는데도 세상은 오히려 더 가혹한 가난과 궁핍의 디스토피아가 됐기 때문이다. 궁핍이 사라지지 않으면 수전노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달라지듯 수전노도 그 성격이 변할 뿐이다. 그래서 수전노의 삶에도 역사가 있고 과거와 오늘의 수전노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과거의 수전노는 굴비 수전노였다. 천장에 짠 굴비 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그걸 반찬 삼아 매 끼니를 때웠다는 옛 수전노의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찾아온 손님이 굴비를 자꾸 바라보는 것마저도 아까워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색함이 가히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 지독한 수전노의 인색함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그는 남들에게만 인색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똑같이 인색하다. 그의 인색함은 객관적이면서 공평해서 내적 모순이 없다.
오늘의 자본주의 수전노는 다르다. 그 역시 원칙을 따라서 경제 행위를 하지만 그 원칙은 이중적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족속들에게는 더없이 후하고 관대하지만 자기와 무관한 타자들에게는 단 한 푼의 금전도 아까워한다. 기부는커녕 세금조차 능사로 떼어먹으면서 저와 제 족속들의 몸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는 과잉 소비를 넘어서 낭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인색함은 이기적이고 불공평하고 자기기만적이다.
차이는 다른 곳에도 있다. 그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지나친 인색함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과거이든 오늘이든 수전노의 삶은 나름의 병리적 증상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때로 신문을 통해서 평생을 인색하게 살아온 어느 굴비 수전노가 말년에 들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는 미담을 읽는다. 이 미담은 한편 병리적이기도 하다. 그건 지나치게 자기에게 가혹했던 삶이 내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돌발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담은 역시 아름답다. 그 이유가 히스테리 때문이든 어떤 경험적 깨달음 때문이든 그 미담은 한 사람의 삶이 그 끝에서 전혀 새로운 삶으로 전복될 수도 있다는 걸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자본주의 수전노에게서 그런 삶의 전복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에게 삶의 일탈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에게는 오로지 철저한 앞날의 계산을 통해서 삶의 안전장치를 구축하는 목적주의적인 행동만이 있다. 있을지도 모르는 일탈의 위험성들은 당연히 사전에 차단된다. 그는 돌발행동의 히스테리를 예방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신경정신과를 다니고 예기치 않은 파산에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보험에도 가입한다. 그렇게 다져진 건강한 심신으로 그는 자본주의가 강요하고 허락하는 안전한 삶의 일방통행로를 달려간다. 오늘날 아무도 이 일탈이 거세된 일방통행로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세상은 점점 더 인색해지고 누구나 점점 더 자본주의적 수전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을 탓해서도 안 된다. 누구에게나 저와 제 족속의 삶이 우선이고 또 거기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니까.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두 명의 가난했던 전임 대통령이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대학조차 포기했던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가판대를 메고 다녔다는 사람이다. 그들은 다 같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녔던 가난의 도덕은 영 달라 보인다. 니체의 분류를 빌리자면, 전자는 주인의 도덕주의자였고 후자는 노예의 도덕주의자였다.
노예의 도덕은 원한이 그 본질이다. 원한을 품은 자가 원한의 노예가 되듯이 돈으로 가난에게 앙갚음하려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된다. 그것이 후자가 가난을 통해서 배웠던 부의 모든 의미였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공과 사의 구분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사유재산 축적에의 가엾은 욕망이었다. 전자의 대통령은 그에 비하면 주인의 도덕주의자였다. 주인의 도덕은 그 본질이 화해다. 화해는 가난의 문제를 사적인 원한풀이가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위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공적인 정치 사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체험은 같아도 도덕은 다를 수 있다. 도덕은 달랐지만 두 대통령은 아쉽게도 저마다의 이유로 가난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패배가 가르치는 정치의식도 있다. 그건 좋고 나쁜 대통령을 가름하는 한 중요한 준거점이 대통령의 가난과 그 도덕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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