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김진영, 낯선 기억들] 찬란함을 기억하는 법

모든 2 2022. 2. 25. 07:34

오늘 아침의 날씨와 같은 찬란함, 사랑의 찬란함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건 소유욕이 아니다. 그건 햇빛을 못 이겨 날개를 푸덕이는 새들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늘을 찾게 만드는 부끄러움이다. 사랑의 환희 앞에서, 찬란하고 투명한 빛의 충만함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는 누추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며칠 밤사이 폭우가 험하게 쏟아지더니 오늘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찬란하다. 아침 일을 마무리하고 늦은 산책을 나간다. 햇빛은 찬연하고, 대기는 투명하고, 아직 초록이 무르익지 않은 여린 나뭇잎들은 청결하고, 장난처럼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가볍고 부드럽다. 벌써 더워진 대기 때문인지 조금 걸었는데도 이마와 몸이 땀에 젖는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는다. 투명한 햇빛 속에서 점점 해맑게 달아오르는 세상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젯밤 내내 무거웠던 마음도 어느덧 무게를 잃고 가벼워진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한 떼의 새들이 나타난다. 새들은 청명한 하늘을 가로지르며 눈부신 햇빛 속을 몇 번 맴돌더니 일제히 가로수 그늘 속으로 날아 들어가 몸을 숨긴다. 문득 궁금해진다. 왜 새들은 찬란한 햇빛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는 대신 그늘진 나뭇잎들 사이로 성급히 숨어드는 걸까.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오랜 비행에 지친 탓일까. 달아오른 햇빛이 더워서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한 걸까. 아니면 그늘 안에 모여서 주고받을 급한 소식들이 있는 걸까.

 

발터 베냐민이 남긴 아름다운 에세이 몇 줄은 대강 이렇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안다. 나를 더 오래 사로잡는 건 그 사람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못나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 얼굴의 주름살, 기미들, 낡은 옷, 비틀거리는 보행 같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왜일까. 왜 그 사람의 그늘지고 결점인 것들이 우리를 더 오래 사로잡는 것일까. 그건 찬란함 앞에서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너무 찬란한 여름 햇살을 차마 견디지 못해 나무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새들처럼 우리는 너무도 빛나는 그 사람의 존재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푸득거리면서 은신처를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그늘과 같은 장소, 육체의 주름살, 투박한 몸짓,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의 장소로 숨어들어 거기에 사랑의 환희와 부끄러움의 둥지를 틀게 된다.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가 

그 사람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되찾게 되는 건 그 둥지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이다.”(발터 베냐민, <일방통행로>)

 

물론 이 아름다운 텍스트 깊은 곳에 함유되어 있는 건 베냐민 특유의 역사철학적 의미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그의 사랑론에 대한 텍스트로만 읽어도 좋겠다. 그렇게 읽을 때 무엇보다 눈에 띄는 두 단어가 있다. ‘찬란함’과 ‘부끄러움’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찬란함은 사랑의 환희가 그렇듯 충만한 빛의 체험이다. 그런데 찬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찬란함이다. 자본주의 세상은 찬란함의 세상이다. 돈, 명예, 지식, 상품 등등 성공과 행복을 약속하는 광휘로 충만한 세상이다. 

이 빛들의 환영 세계를 마르크스는 일찍이 빛의 주문에 도취당한 마술의 세상(판타스마고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또 하나의 찬란함이 있다. 밤새워 폭우 지나고 찾아온 빛들의 충만함, 오늘 아침 풍경의 찬란함이다. 우리가 사랑의 환희를 찬란함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오늘 아침 풍경의 찬란함과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충만한 빛들의 광휘인 이 두 찬란함의 차이는 정확히 무엇일까.

 

세상의 찬란함과 빛들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자본주의적 삶은 그 빛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매진한다. 하지만 

그 빛들은 구조적으로 소유 불가능한 빛이다. 그 빛들은 한 조각 소유하면 또 다른 빛들로 확대 재생산되는 환영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의 날씨와 같은 찬란함, 사랑의 찬란함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건 소유욕이 아니다. 그건 햇빛을 못 이겨 

날개를 푸덕이는 새들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늘을 찾게 만드는 부끄러움이다. 사랑의 환희 앞에서, 찬란하고 투명한 빛의 충만함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는 누추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때 우리는 새들처럼 그늘로 숨어들어 거기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모든 절정의 찰나처럼 한순간 빛나고 사라질 덧없는 찬란함은 그 둥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온전히 간직된다. 부끄러움이라는 파수꾼이 그 둥지를 지키기 때문이다.

 

빛과 그늘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 안에도 있고 자기의 삶 안에도 있다. 그늘보다는 빛을 사랑하고 밝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과 사람 사는 일의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때로 세상의 그늘진 곳들을 눈여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은 망각해버린 찬란한 세상에의 꿈을 거기에서 다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병든 몸처럼 삶이 처한 그늘진 곳을 새삼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다름 아닌 거기가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이 날개를 푸덕이는 둥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