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츠비는 알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환이 타락의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 데이지가 마침내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 자신이 결국 속물적인 동부 토착 귀족들의 더러운 음모에 걸려서 목숨마저 잃고 말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환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미국사와 미국소설을 공히 관통하는 모티브가 있다면 ‘사냥’이다. 소위 프론티어 정신을 앞세워 자행되었던 미국 번영사가 무자비한 신대륙 사냥기였듯 근대 미국소설의 원조로 꼽히는 멜빌의 <모비 딕> 또한 거대한 백고래에 대한 처절한 사냥기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적 사냥본능이 현실과 소설 안에서 정점에 달했던 건 미국의 1920년대였다. 재즈와 알 카포네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미국은 자본의 광기 시대, 곧 다가올 대공황의 재난도 모르는 채 온 세상이 자본이라는 짐승을 잡기 위해 날뛰었던 사냥 시대였다.
그 사냥터의 세상에서 버려진 세대들, ‘길 잃은 세대들’(Lost Generations)이 태어났다. 가진 것 없는 청년세대가 그들이었고 그 세대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였다. 두 작가는 미국의 후예답게 각자 새로운 사냥의 길을 떠났지만 그들이 포획하려는 사냥의 동물은 판이했다. 헤밍웨이가 잡고 싶은 사냥물은 아프리카의 초원과 쿠바의 바다로 상징되는 자연의 야생성이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포획하고 싶었던 동물은 자연이 아니라 문명의 심장부인 메트로폴리스에 있었다. 그는 그 도시의 동물을 찾아서 뉴욕이라는 자본주의의 정글 속으로 사냥을 떠났고 그 사냥기가 소설 <위대한 개츠비>다. 그런데 한낱 자본의 사냥꾼이었던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줄거리만 읽으면 그는 오히려 타락하고 어리석고 가엾은 청년이어야 옳다. 그런데도 소설은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부른다. 그 위대함이란 무엇일까.
우선 개츠비는 위대한 타락주의자이다. 그는 헤밍웨이처럼 자연으로 도피하는 대신에 타락한 시대의 현장인 메트로폴리스의 정글로 투신한다. 그는 타락의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냉엄한 현실주의자이며 그런 점에서 루카치가 말하는 문제적 투사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위대한 낭만주의자이다. 타락의 정글 안에서 그가 기필코 나포하려는 동물은 놀랍게도 이미 멸종해버린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역설이 데이지와의 러브스토리이고 그것이 소설을 불후의 순애보적인 멜로드라마로 만들지만 개츠비의 낭만적 위대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낭만적 위대함은 그런 사이비 순수가 아니라 오히려 비순수 속에 있다.
사실 이 낭만적 연애소설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타락한 인물들이다. 개츠비와 데이지도 다르지 않다. 데이지가 자본이 만들어낸 허영과 사치의 인형이라면 개츠비는 그 부잣집 딸을 교두보 삼아 상류계급의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속물적 연애꾼이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 속물적 연애 속에서 낭만주의자 개츠비가 태어난다. ‘지진계보다 예민한 낭만적 감각’과 ‘희망을 알아보는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개츠비는 데이지와 첫 키스를 나누던 순간, 비순수의 화신인 그녀에게서 아무도 믿지 않는 순수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타락한 데이지를 순수의 환으로 사랑하는 비극적 운명에 빠진다. 하지만 개츠비는 또 하나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환이 타락의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 데이지가 마침내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 자신이 결국 속물적인 동부 토착 귀족들의 더러운 음모에 걸려서 목숨마저 잃고 말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환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가능 속으로 더 깊이 투신한다. 그것이 타락한 낭만주의자 개츠비의 위대함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위대함이 있다. 그건 개츠비의 위대함이 아니라 소설 자체의 위대함이다. 이 소설은 개츠비가 죽은 뒤 돌연 미국의 시원을 기억시키는 역사소설로 장르가 변한다. 죽은 개츠비 대신 신대륙에 처음 도착했던 네덜란드 청교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죽음의 항해 끝에 마침내 도착한 신대륙 앞에서 그들이 온몸으로 느꼈을 최초의 환, 새로운 역사와 미래의 약속으로 그들의 가슴 안에서 환하게 켜졌던 ‘초록색 불빛’과 더불어 소설은 끝난다. 그렇게 멜로드라마 <위대한 개츠비>는 그 끝에서 1920년대 타락한 미국에 잃어버린 최초의 꿈을 환기시키는 비판적 역사소설로 다시 태어난다.
때로 역사 안에서는 초록색 불빛의 램프가 켜진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늘 현실로 타오르기 전에 환멸이 되어 스러지곤 했다. 지금 다시 초록빛 램프가 불을 켰다. 남북의 두 정상이 악수를 나누며 램프의 불씨를 점화했다. 물론 이 작은 불씨가 새로운 역사의 불꽃이 되기에는 수많은 장애가 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심지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개츠비의 위대함을 기억할 때다. 새로운 세상과 삶의 환을 믿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한 낭만주의자의 단호한 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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