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29

[김진영, 낯선 기억들] 낭만에서 기억으로

연정론이든 선의정치론이든 그 낭만적 정치는 결국 오래된 구습인 위로부터의 정치일 뿐이다. 이제 도래해야 하는 새로운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여야 한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다. 과거의 권력들, 그 권력들이 저지른 불행들, 그 불행의 희생자들이 기억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영웅 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대선 정국 안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의 기세가 거세다. 그 기세의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는 그가 앞세우는 ‘새로운 정치’라는 이슈도 있다. 하기야 새로운 정치라는 슬로건은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오래된 농담 같은 메뉴이기는 하다. 새로운 정치의 구현을 약속하지 않았던 대권 후보가 언제 있었던가. 그런데 안 지사의 경우 이 낡은 메뉴가 다시 주목을 끄는 건 그 새로움의 내용이 ..

[김진영, 낯선 기억들] 어느 후배의 투병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보신의 도구로 전락한 특권들이 어떻게 부메랑의 칼날이 되어 그들의 삶에 복수하는지를 보는 일은 오래된 종양으로 가득한 세상의 속살을 목격하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들의 불행은 누리던 특권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야 할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가엾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리라.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지난주 오랜 동안 투병을 하고 있는 후배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근자에 더 병세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그런데 지금은 병원마저 떠나서 집에 머무는 그의 얼굴과 태도는 내내 편안하고 밝았다. 오래전 유학 중에 알게 된 그는 늘 그렇게 밝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삶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었다. 유학 중에도 남달리 생활이 어려워서..

[김진영, 낯선 기억들] 미물들의 권력

미물들의 권력은 모른다의 뻔뻔함과 심문자들의 무능력 덕분으로 이번 경우에는 청문회의 시험대를 큰 탈 없이 속여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겁하고 가련한 미물성의 육체는 결국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들키고 말 것이다. 아무리 음험하고 노회하더라도 미물성의 권력으로는 끝까지 속일 수도 막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과 진실의 힘이기에.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작은 갑충 한 마리가 방바닥을 빠르게 기어간다. 슬쩍 건드리니까 돌연 딱딱하게 몸을 움츠리고 정지해서 꼼짝도 않는다. 갑충은 지금 절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자기는 죽었다는 것, 더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니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몸짓 신호는 거짓말이다. 갑충은 정말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 짐짓 죽은 시늉을 하는 것..

[김진영, 낯선 기억들] 광화문의 밤 또는 풍경의 정치학

광화문의 촛불은 순간의 도취와 행복을 넘어서 부당한 모든 권력들을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응징하는 정치적 인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청와대의 복마전만이 아니라 사회와 일상 속 나아가 분노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속까지도 스며 있을 어두운 세력의 그림자들을 발본하는 빛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토머스 핀천의 는 몹시 우울한 포스트모던 전쟁 소설이다. 그 소설 안에서 세계는 지배 권력의 음모로 가득하고 등장인물들은 그 음모의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들처럼 생존한다. 주인공 슬로스롭도 다르지 않아서 그는 권력과 음모의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파블로프의 개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해 거리로 나온 그는 돌연 행복의 충격에 휩싸인다. 눈앞에 가득 펼쳐진 장엄하고도 황홀한 일몰..

[김진영, 낯선 기억들] 헌혈의 시간

역사는 앞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로 되돌아가려는 맹목적 자연의 핏줄, 그 맹목적 핏줄에 기생하는 어두운 오컬티즘의 핏줄, 그 검은 심령주의에 기생하는 정치권력들의 음험하고 교활한 핏줄들이 서로 수혈되고 유착되는 무당 판이 작금의 현장이다. 야만에게 빼앗겼던 핏줄의 권위를 지키면서 극복하는 또 하나의 핏줄이 필요하다. 지금 거리로 모여 이어지는 민주의 촛불들이 그것이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우리는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명은 자연과 역사의 관계다. 그 둘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문명은 야만이 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자연과 역사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생명 현상이다. 그 둘은 모두가 핏줄이다. 자연과 역사가 핏줄이라는 건 그 둘이 모두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걸 ..

[김진영, 낯선 기억들] 사체를 바라보는 법

경찰과 검찰은 마침내 백남기 농민의 사체에 대한 부검영장을 얻어냈다. 이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분명 곰팡이의 시선을 닮았다. 그들에게 백남기 농민의 사체는 아직도 쓸모가 있는,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 얼마 전 사진 비평문 하나를 썼다. 어느 사진 상을 받은 모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였다. 그 사진의 오브제는 곰팡이다. 작가는 사람의 두상을 석고로 제작한 다음 그 위에 습지를 바르고 다양한 곰팡이 균들을 배양해서 그 생태를 영상으로 포착했다. 워낙 독특한 이미지여서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 나름 고민을 많이 한 끝에 나는 죽은 것들을 응시하는 시선이라는 주제와 내용으로 긴 비평문을 쓸 수 있었다. 곰팡..

[김진영, 낯선 기억들] 외치는 침묵

막차 안에서 외치던 남자는 곧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비켜 간 한 구석 자리에 등을 묻고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침묵 속에서 더 크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 정규직이 아닌 사람은 밤에 강의한다. 늦은 강의를 마치고 술이라도 한잔하면 막차를 타기 십상이다. 사슬처럼 이어진 하루와 또 하루의 경계를 건너가는 마지막 열차 안 풍경은 세상의 얼굴을 닮았다. 지치고 외롭고 무거워 보인다. 그런데 피곤과 무관심이 가득한 그 열차 안에서 때로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제도 막차 안에서 작은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얼굴이 마르고, 옷이 허름하고, 가득 술에 취한 한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취기에 섞..

[김진영, 낯선 기억들] 사라지는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이 왜 정신질환자들과 노숙자들뿐일까. 어느 부랑인들은 감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탈북자들은 보호소로 사라지고, 어느 지적장애자들은 엉뚱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사라지고,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은 바다 밑으로 사라져서 지금도 돌아올 줄 모른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이 주일에 한 번씩 지방 강의가 있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기차를 타기 전에 커피 한 잔 뽑아들고 광장에 서 있으면 거의 매번 서성이던 이들이 다가와서 담배나 푼돈을 요구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늘 분홍빛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꼭 안고 광장을 배회했다. 말도 건네지 않고 달라는 것도 없이 묵묵히 우울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뜻없이 서성이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모습..

[김진영, 낯선 기억들] 조용히 술 마시는 방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조용히 술 마시는 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의 방이다. 또 하나는 외로운 사람, 버려진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방이다. 승리자인 권력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희생자인 시인은 조용히 술 마시는 방을 나와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어느 젊은 검사가 세상을 버렸다. 이 소식은 듣는 사람을 슬프면서도 놀라게 한다. 남다른 미래를 보장하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던 젊은이는 왜 세상을 버렸을까. 그는 몇 줄의 글을 유서로 남겼다. 업무가 너무 많았다고, 조직의 압력이 너무 무거웠다고 그는 적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직속상사의 무례한 행동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안에는 이런 고백도 있다. 어느 날에는 동료 검사의 결혼식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