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낯선 기억들 29

[김진영, 낯선 기억들] 꿈들의 사전

누구나 저마다의 꿈이 있고 그 꿈들은 서로 얼굴이 다를 것이니 캘린더 위에 그려지는 꿈들의 그림도 참으로 다양하리라. 사실 꿈이란 애초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무수한 꿈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사전을 만들어본다면 어떤 꿈들의 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새해가 왔다. 새해가 오면 누구나 꿈을 꾼다. 도래할 시간의 숫자들만이 가득한 캘린더가 스케치북인 듯 그 위에 새로운 한해의 꿈들을 그려넣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꿈이 있고 그 꿈들은 서로 얼굴이 다를 것이니 캘린더 위에 그려지는 꿈들의 그림도 참으로 다양하리라. 사실 꿈이란 애초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무수한 꿈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사전을 만들어본다면 어떤 꿈들의 사전이..

[김진영, 낯선 기억들] 가을 하늘은 왜 텅 비었나

가을은 침묵의 현자를 닮았다. 시끄러운 말 대신 다만 텅 빈 하늘로 오래 잊고 살았던 귀한 것들을 다시 기억시킨다. 그건 잃었던 나일 수도 있고, 차가운 타자가 되어버린 이웃일 수도 있고, 심지어 먼 과거의 시간 속에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얼굴 없는 존재들일 수도 있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요양병원의 하루는 아침 산책으로 시작한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길지 않은 산책은 병동이 가깝고 나날이 붉은빛이 젖어드는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끝나곤 한다. 거기에 등 기대고 앉아 잠시 숨 고르며 고개를 들면 맑고 깊은 가을 하늘이 눈 안에 가득해진다. 그러면 엉뚱한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질문: 가을 하늘은 왜 저토록 텅 비어 있는 걸까. 텅 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야말로 공..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댈러웨이 부인의 꽃

우리는 누구나 두 개의 인생을 산다. 하나는 나 있는 내 인생, 나의 현재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나 없는 내 인생,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사후의 삶이다. 다른 방식으로 나 없는 내 인생을 준비했던 이들도 있다. 비록 소설적 인물이기는 해도 버지니아 울프의 이 그렇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다. 벌써 아이가 둘이고 능력 없는 남편 대신 대학의 청소부로 일하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상상하지 않았던 불행이 찾아온다. 남겨진 시간이 두 달뿐인 말기 암 판정이 그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이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두 개의 인생을 위해서 나누어 쓴다. 우선 그동안 살아보지 못했던..

[김진영, 낯선 기억들] 조동진의 비타협적 가슴

조동진의 가슴은 단호하고 비타협적이다. 실용주의를 익히지 못한 아이처럼 그의 가슴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쉬움을 외면하고 대신 사랑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사랑의 가슴은 먼 길을 가야 하고, 우회해야 하고, 야윈 얼굴이 되어야 한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들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이라고 롤랑 바르트는 슈만에 대한 음악 에세이에서 고백한 바 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어려움 앞에 서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나는 내가 오래 사랑했던 한 가수와 노래에 대해서 사랑을 고백하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간 조동진과 그의 가 그 고백의 대상이다. 세대가 좀 뒤지기는 해도 나는 그와 동시대인이다. 그건..

[김진영, 낯선 기억들] 할아버지의 큰 숨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나는 서울의 변두리 망우동에 산다. 행정지명보다는 오래전부터 망우리 고개 또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근자에 한동안 일을 쉬게 된 탓에 주변 공원으로 아침 산책을 하는 일이 꽤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사실도 절로 알게 되었다. 우선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라는 지명의 역사적 사연이다. 그야말로 걱정근심이 많았던 말년의 태조 이성계가 근처 동구릉에 능지를 정하고 돌아오던 고개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이제는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이곳 공동묘지에 우리 근대사의 곳곳에서 족적을 남겼던 많은 인물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인문학 공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공원 입구..

[김진영, 낯선 기억들] 카프카의 희망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그가 남긴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도 알 것이다. 그건 세상의 희망에 대한 에피소드다. 늘 세상을 어둡게만 바라보는 카프카에게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어느 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자네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카프카가 대답했다: “희망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 하지만 그 많은 희망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네.” 이 아리송한 희망론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몇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부정적인 해석이 있다. 카프카의 말은 사실상 오늘 우리가 처한 어두운 희망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돌아보면 지금 여기의 현실 안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무수하고 곳곳에 편재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

[김진영, 낯선 기억들] 무지개 김밥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언제부터인가 일찍 일어나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서둘러 작은 아침을 챙겨 먹고 작업실로 향한다. 잔뜩 밀린 일들을 치우기 위해서다. 그런 중에 습관이 또 하나 생겼다. 작업실 가는 길에 김밥 한 줄을 챙기는 일이다. 되도록 점심때를 미루고 아침 일을 오래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간식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낮게 비가 내린다. 이런 날에는 뜻도 없이 주변의 이것저것들을 오래 응시하게 되는데 마침 열어놓은 김밥에 눈이 닿았다. 문득 그 위로 잊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오래전 유학 시절 잠깐 알고 지냈던 한 부인의 얼굴이다. 그분은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광부였던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그때 시작한 작은 한식당을 지금까지 하고 있었다. 오가다 친해졌는데 자연스레 이런저런 속..

[김진영, 낯선 기억들]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투표일 아침이 생각납니다. 고백하건대 그때까지도 저는 심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다른 후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투표 자체를 망설였습니다. 그 망설임은 지난 정치들로부터 받아들여야 했던 배신감과 모욕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 제도정치와 현실정치의 본질적 한계성에 대한 제 자신의 오래된 회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은 당당하게 대통령이 되셨지만 당신이 승리의 두 손을 번쩍 들었을 때에도 저의 회의는 여전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은 선물을 약속받은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간소하지만 진실해서 멋있었던 취임식, 단호하고 자신만만했던 취임사, 다정하고 편안했던 카퍼레이드, 곧이어 당신 스스로 발표하신 탕평인사 등등이 저..

[김진영, 낯선 기억들] 세월호와 사자 꿈

마지막으로 사자는 미지의 어떤 한 나라의 은유일 수 있다. 어쩌면 아이들과 희생자들이 어딘가에서 꿈꾸고 있을 나라, 유가족들의 상처가 그 아픔으로 알고 있는 나라, 노란 리본의 애도들이 기억하는 미래의 어느 한 나라의 은유일 수 있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원장 쿠바의 늙은 어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산티아고다. 그는 세 달째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살라오’(최악의 불운)라고 부르면서 측은해한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 먼 바다로 나가서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를 잡는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에게 고기를 모두 뜯기고, 거대하고 앙상한 뼈만 끌고 돌아온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으로 노벨상을 받기도 했던 해양소설 의 대강 줄거리다. 세월호가 3..

[김진영, 낯선 기억들] 두리번거리기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목이 아프다. 상하좌우 마음대로 고개를 가눌 수가 없다. 정형외과에 갔다. 의사는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책 보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했더니 그런 줄 알았다는 듯 웃고 나서 처방전과 함께 충고도 준다. 인체 중에서도 목은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머리는 너무 무거워서 목뼈는 늘 지나친 하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 고개를 바로 들고 눈앞과 좌우를 둘러보며 지내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늘 고개를 꺾고 몰두하면서 살도록 되어서 죄 없는 목이 고통과 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을 숙인 채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자주 고개를 바로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정말 근자에 목뼈를 너무 혹사했다. 먹고살아야 해서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