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41

임순례,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확인시켜 주는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1 서울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이란 잡지를 집어 들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요즘, 이 잡지는 구태의연한 듯 보이기도 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잡지, 그래서 2000년대에 서서 보면 본문을 읽기도 전에 격정노도의 젊은 한때를 거슬러 생각하게 만드는 잡지다. 월간 [말] 2002년 5월호 예전에 편집디자인의 모범이라고 칭송받으며 지식인들 사이에 읽히던 이나 소박한 편집에 소박한 내용이 담겨 있어 서민들의 잡지처럼 여겨졌던 도 현대적 감각으로 편집과 내용이 옷을 갈아입은 느낌을 주지만, ‘말’은 아직도 남루한 옷을 입고 서울역 근방을 배회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고, 정치권력에 의한 노골적..

귀농자가 생태주의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0 모악산에 방을 얻어 산중생활을 꾸리고 있는 박남준 시인의 산문집 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똑똑, 안 돼. 들어오지 마.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똑똑, 싫어. 난 너희들과 놀고 싶지 않아. 밤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귀찮은 손님들, 문밖엔 날벌레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다르르르 다르르르. 저건 아마 다리가 긴 각다귀 종류일 거야. 따라라락 따라라락. 이건 음, 소리의 크기로 봐서 뿔잠자리 정도는 될 거야. 파르륵 투득 파르륵. 이 녀석은 작은 나방들이고. 푸득푸득 퍽퍽. 저 녀석은 아주 큰 나방이네. 부웅 따악. 이렇게 소리를 내는 친구는 풍뎅이가 틀림없어…." 여름밤의 산중은 온갖 벌레 때문에 극성이다. 특히 살벌한 모기의..

조심스런 걸음으로 천천히 끝내 가서 만나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9 사진출처=pixabay.com 온갖 목숨들로 부산하던 벌판이 점점 그 생기를 접고 겨울채비에 들어가고 있다. 이곳 무주땅이 고도가 높은지 농부들은 대부분 올벼를 심은 까닭에 추수가 끝나가고 베어낸 벼의 밑동에선 아직도 남은 온기가 아깝다는 듯이 파란 싹이 다시 돋고 있다. 겨울바람이 닥치면 그 상태로 얼어붙고 말 것이다. 자연은 한 계절을 버리고 다른 계절을 맞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사위어 가는 목숨들의 한끝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텃밭에선 배추가 자라고 있다. 날마다 해가 서쪽 산머리를 넘어가면 물을 주었다. 작년에 모아서 삭혀두었던 오줌을 물에 타서 액비로 주고 하루의 노동을 마감하면, 이미 어둠이 길어지고 밤새 싸늘한 ..

멧돼지와 화물차, 그건 너그러움일 거야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8 사진출처=pixabay.com 산골에 있는 논밭은 항상 짐승들의 피해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 다른 마을에 사는 이웃이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멧돼지가 다 익은 벼를 해치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요할 때는 군청에서 엽사들을 동원해서 멧돼지를 잡기도 한다는데, 그런 탓인지 요즘 산속에서 간간이 총소리가 들리곤 했다. 콩 파종기에 녹음된 총소리를 틀어놓은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수렵이 금지되어 있는 무주군에서 이런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은 비슷한 고민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 이웃은 멧돼지가 곡식을 더 해치기 전에 서둘러 벼를 베고 탈곡 준비를 했다. 이런 사정은 우리 논도 예외가 아니다. ..

봉선화 연정,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 그립기도 그리운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7 사진출처=pixabay.com 지금은 가을, 내일이면 만월이다. 그야말로 한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가을은 예비되어 있었고, 밤에는 체감온도가 낮을수록 은총처럼 더욱 투명한 달이 뜨고 하늘은 여전히 검푸른 빛을 잃지 않는다. 아침에 보니 마당 한켠에 심어놓은 봉선화는 꽃이 지고 줄기에 달강달강 씨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 주머니를 건드려 보고서야 처음으로 현철이 부른 대중가요, 에 나오는 ‘손 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라는 말뜻을 알 것 같았다. 그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더이상 참지 못할 그리움을 가슴 깊이 물들이고 수줍은 너의 고백에 내 가슴이 뜨거워 터지는 화산처럼 막을 수 없는 봉선화 연정.’ 애틋한 사랑의 감..

달, 어둠과 상생하는 빛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6 아이를 키우면서, 올해는 아예 농사를 적게 짓기로 했다. 작년에야 초보 농사꾼 마음에 농사거리가 되는대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맸다. 요령도 익히지 못한 탓에 부실한 몸이 내내 고달팠지만 가을엔 그래도 노력한 만큼의 수확은 거두어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그럴듯한 변명도 있고 하여 밭농사 규모도 줄이고 가능한 요령을 피웠는데 하늘도 눈치를 채셨는가, 제대로 수확한 것이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정성이 부족했으니 하늘도 보살펴 주지 않는 것 같다. 작년엔 열다섯 배의 소출을 냈던 감자가 올해는 배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도 겉은 멀쩡한데 깎아보면 속이 썩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선 올봄의 지독한 가뭄 탓으로 돌렸지만 씨감자를 심을 때 충분히..

밤에도 칼라가 있으니, 평소 안 하던 짓도 해보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5 얼마 전 한밤중에 손님이 방문했다. 서울 살 때 상계동에서 만났던 성당 후배 부부인데, 온다던 시간이 훨씬 넘어도 도무지 기척이 없었다.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안성면에 도착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서 한 시간이 족히 넘었는데도 후배 부부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구시렁거리다가 나중엔 걱정으로 변했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산길을 오르는 게, 물론 자동차를 타고 온다고 해도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초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중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결국 화물차를 몰고 면까지 나가보았는데, 면에서 집에 전화를 해보니 방금 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산에서 길을 잃다 나중에 이야기를 ..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4 사진=한상봉 앨범 사진 촬영 무주 산골짜기에 마련한 우리집에는 잊을 만하면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그립고 반가웠던 친구며 선배들도 있었지만, 귀농할 곳을 찾아서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언제 어떤 방법으로 귀농할지 딱 부러지게 결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마음은 천리를 달리지만 몸은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골 살림에 맞추어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고, 외진 산골에서, 그것도 객지에서 불편한 삶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 서지 않는 것이다. 남자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은 ‘여기서 어떻게 먹고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여자들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은 ‘근처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무섭지 않..

영적 가난은 육체적 가난만 못하다, 수행하는데...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3 어린 시절엔 집집이 돌아다니며 시주를 청하는 탁발승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어느덧 시류(時流)에 밀려나 사라진 것 같다. 언젠가 서울 나들이길에, 충무로 전철역 4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칠순은 됨직한 탁발승을 보았다. 불전함 옆에 잡동사니를 담은 듯한 비닐백이 놓여 있었고, 흰 운동화 차림의 스님은 신문지를 여러 겹 접어서 방석 대신으로 절을 할 때 무릎과 팔꿈치에 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지하 플랫폼에 울리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한차례 승객들이 몰려간 뒤엔 잠시 신문지를 깔고 앉아 포개놓은 발 옆에 목탁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면서 천장에 무심한 눈빛을 던지곤 했다. 잠시 후 또 한차례 승객들이 계단을 우르..

흐르는 동안에만 사랑은 사랑으로 남는다_고양이와 생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2 우리집 꼬맹이가 요즘 우울하다. 여기서 꼬맹이란 우리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인데, 나름대로 기구한 운명 끝에 우리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몇 해 전에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경북 상주로 이사할 무렵이었다. 이사하기 며칠 전부터 부엌 창문에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내다보이는 앞집 지붕에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아비는 본 적이 없고, 어미 고양이만이 이따금 들러서 새끼들을 보곤 하였는데, 도무지 먹이를 가져다 주는 기색이 없었다. 이 고양이들은 처마 끝까지 나와서 놀다가 간혹 아래 연탄광에 떨어지기도 했다. 창문 밖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새끼 한 마리가 광에 처박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처마 끝에 과자도 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