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0
모악산에 방을 얻어 산중생활을 꾸리고 있는 박남준 시인의 산문집 <별의 안부를 묻는다>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똑똑, 안 돼. 들어오지 마.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다 알고 있단 말이야. 똑똑, 싫어. 난 너희들과 놀고 싶지 않아. 밤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귀찮은 손님들, 문밖엔 날벌레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다르르르 다르르르. 저건 아마 다리가 긴 각다귀 종류일 거야. 따라라락 따라라락. 이건 음, 소리의 크기로 봐서 뿔잠자리 정도는 될 거야. 파르륵 투득 파르륵. 이 녀석은 작은 나방들이고. 푸득푸득 퍽퍽. 저 녀석은 아주 큰 나방이네. 부웅 따악. 이렇게 소리를 내는 친구는 풍뎅이가 틀림없어…."
여름밤의 산중은 온갖 벌레 때문에 극성이다. 특히 살벌한 모기의 공격에 온 밤이 지옥이다. 졸리긴 한데 귀밑에서 윙윙거리는 소리에 이내 잠을 깨고, 간지럽고 성가셔서 여간 곤욕을 치르는 게 아니다. 마을에선 다들 한방 가득 차지하는 모기장을 치고 잔다. 그런데 내 경우엔 모기장이 도무지 답답해서 그 짓도 못한다. 그러니 천상 빈틈없이 마루에서 방으로 벌레가 틈입할 수 있는 곳을 꼼꼼히 막아두고, 그래도 날아들어온 모기가 있다면 기어이 그놈을 잡아야 잠을 청한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파리와 틀리게 모기는 밝은 곳에선 천장이나 구석에 붙어 있다가 불을 끄면 벽을 타고 하강하여 목표물로 접근해 포식하고 달아난다. 밤 시간을 어수선하게 만들기는 다른 벌레도 마찬가지다. 하루살이·나방·풍뎅이까지. 박남준 시인은 그 벌레들의 방문을 마다하면서도 즐기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방에 들어온 벌레들을 이 시인은 어찌하는지 궁금하다.
사진출처=pixabay.com
귀농자에게 생태주의란 언감생심
추수다 뭐다 하여 바쁘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지고 그 많던 벌레들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러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산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살생을 요구하는지 말이다. 유기농을 한다고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논과 밭의 흙이 점점 살아나고, 따라서 다시 웅덩이에 미꾸라지가 생기고 메뚜기가 살판났다고 하지만, 정작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깔끔하고 쾌적한 삶을 위하여 집안에 침투하는 벌레란 벌레는 다 죽이게 되고, 마당에 돋아난 풀들은 뱀이나 벌레 꼬이지 말라고 죄 뽑아낸다. 바지런한 사람일수록 앞마당은 깨끗해야 하고, 다만 내가 가꾸는 텃밭 채소와 꽃과 나무들만 건사한다. 그래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생태주의란 격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유기농이란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곡물을 먹기 위함이지 생명존중과는 좀 거리가 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에게 이로운 생명만 존중하자는 태도다. 고추를 심으면서 엄청난 잡초를 당해낼 재간이 없어 비닐을 덮어 씌우는데, 사실 그 비닐 속이란 햇빛을 쬐려고 비집고 나오려던 잡초들이 질식사·압사당하는 공간이다. 그 중에 일부가 고춧대 밑으로 비어져 나오지만, 부지런한 농부라면 여지없이 이 녀석도 뿌리째 뽑아낸다. 내 농사가 그러하고, 내 살림이 그러하다.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간 산중생활을 접어야 할 것 같다. 난감하다.
산중생활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땔감’에 대한 것이다. 흙집에서 나무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구들방에 눕는 것은 고생스럽긴 해도 호사(好事)라면 호사다. 난방비도 절약되고 몸에도 좋으니 말이다. 물론 여기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와야 하는 수고가 뒤따른다. 낙엽송이나 소나무가 많은 곳에 가서 마른 잔가지를 줍는데, 이 녀석은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두어도 화락 타버리면 그뿐이라 고생만 많이 시키지 구들을 제대로 달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뭇가지는 불쏘시개나 밑불에 쓰려고 걷어온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장작을 만들 요량으로 짱짱한 나무를 베는 것이다.
군에서 도무지 간벌을 하지 않아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에 들어가서 지난 수해나 태풍 때 넘어진 나무를 찾아다닌다. 양심상 멀쩡하게 서 있는 나무를 베는 것은 도무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탓이다. 그것도 낙엽송처럼 곧게 자란 것이어야 베기도 좋고 나르기도 좋고 장작을 패기도 좋다. 그러나 정작 나무에 엔진톱이나 도끼날을 들이댈 때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나무가 쓰러져 있긴 해도 여전히 땅에 뿌리를 대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토막내어 짊어지면 수액냄새가 코끝에 질펀하다. 여름에 무성한 잡초를 베어낼 때마다 낫에 묻어나던 진한 풀냄새처럼 어떤 생기가 한 순간에 솟구쳐 나오는 것 같다. 생명 가진 존재들이 은밀히 감추어 두었던 뭔가를 마지막으로 크게 호흡하며 우주로 되돌려 놓는 것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유치환의 선한 나무
고등학교시절 일기장에 적어놓은 시가 있었다. 남성적 기개와 여성적 섬세함이 한꺼번에 묻어나 있던 까닭에 흠모하던 시인 유치환, 그리고 그의 <선(善)한 나무>라는 산문시였다.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 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 )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 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이미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한 그루 나무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 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은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산이 좋아서 산에 들어와 살며 숲이 좋아서 숲속을 거닐며 마당엔 소담스런 나무 한 그루 심어 즐길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작 우리가 탐한 것은 숲에서 구하는 땔감과 나무에서 얻는 열매가 아니었을까? 목숨들마다 하나같이 하늘로부터 얻어 누리는 천명이 있을 법한데, 나는 어떤 천명을 얻어 누리기에 몸을 보존하려고 나무를 베어내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베어 넘긴 목숨은 어디 없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하고서 상처 입힌 영혼은 없었을까?
세상을 살면서 얻은 결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렸을 때는 누구를 보든 뭐를 보든 항상 좋은 나라/나쁜 나라, 좋은 사람/나쁜 사람이란 이분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 편은 좋은 나라/사람이고 상대편은 나쁜 나라/사람이었다. 내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잣대였다. 그 잣대가 평생을 가는 사람도 있고, 생각이 바뀌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지금도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한가지 답변이 있다. ‘남을 주눅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으니, 모두가 온전히 받은 생명을 누려야 할 텐데, 그걸 가로막고 생기를 빼앗아 가니 말이다. 제 잘난 맛에 혀를 놀리거나 쥐꼬리만한 것이라도 권력이나 돈을 빌미로 사람을 윽박지르는 이는 은총을 가로막는 사람이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누구에게든 고백해야 할 노릇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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