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눈은 내리고, 길 떠나는 형에게

모든 2 2020. 6. 16. 01:45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마지막회

 

사진출처=pixabay.com

 

형은 병원 현관의 넓은 창으로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한 달 전부터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복수는 빼기 무섭게 다시 차올랐다. 내내 통증을 호소하는 형에게 병원에선 링거 영양제와 진통제를 주사하는 것밖에는 다른 처방을 내리지 않았다. 부어오른 팔에 반복되는 주사와 링거주머니를 형은 지겨워했다.

형은 답답한지 입원실 문을 자꾸 열어놓으라고 청했고, 퇴원하던 날은 형수가 수속을 밟는 동안에 서둘러 병원 로비로 나왔다. 현관 유리 너머로 방금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주차장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굵은 눈발이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며 차가운 공기를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형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휠체어에 앉아 그저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분주한 삶이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을까? 고단한 인생이 형과는 인연이 멀어지고 있다는 조짐이었을까? 형의 시선은 멈추어져 있었다.

형은 서울에서 기(氣) 치료를 받는 것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밥은커녕 물도 제대로 못 넘기는 기진한 상태에서 기 치료를 받는 게 무리라고 여겼으나, 아무도 형한테 그런 말을 옮길 수는 없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것이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형수와 내가 형을 데리고 서울에 마련한 숙소로 달려가는 동안, 김해에서는 처남과 처제가 서울로 오고 있었다.

형은 지난 20년 동안 가깝게 지냈던 처남을 피붙이보다 편하게 여겼고, 처남은 얼마 전에 입사한 회사에 휴가를 내고 형을 돌보러 오는 길이었다. 숙소에서 처남과 처제는 형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속옷도 새로 입혀드렸다. 형은 다시 기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그건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었다. 형은 결국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처남과 내가 형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119에 전화하여 가까운 병원으로 모시고, 형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는 간단했다. 그날 새벽에 다시 구급차를 불러서 형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경남 김해로 시신을 모셨다. 김해 성모병원 영안실 앞에 차를 대자, 벌써 성당 교우들과 친지들이 나와 있었다. 그날로 서울과 인천에 살던 가족들이 김해로 달려왔고, 딸밖에 없는 자녀들을 대신하여 동생인 내가 상주(喪主)가 되었다. 성당에선 교우들이 매일같이 연도를 바치러 왔다. 문상객들은 주로 대한항공 동기생들과 성당에서 더불어 활동했던 동료들이었다. 직장과 성당 그리고 가족이 그의 세계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얼마 전에 형에게 눈을 감은 채 먹으로 낙서를 해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눈을 감아도 형의 그림은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어쩜 형은 낙서를 할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편하게 내버려두지 못하고, 일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늘 긴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주변에 질서를 주기 위하여 긴장과 스트레스를 혼자서 감당한 것이다.

형이 죽기 전날 처남에게 “이제부터는 아프면 아프다고 할 거야!”라고 어린애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형은 암환자 특유의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주변사람들을 의식해서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병간호를 할 때도 형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형, 어디 아파?” 하고 묻곤 했는데, 항상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내가 답답해서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고 했는데, 형은 끝내 그 긴장을 놓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났다. 형은 끝내 그 고통을 송두리째 안고 이승을 떠났다. 이 세상 아무에게도 고통의 찌꺼기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형이 눈을 뜨고 그린 그림은 집 한 채와 사람들이었다. 그 집은 성당이라 했고 혜윤이·혜진이 두 딸과 함께 성당에 가는 거란다. “형은 성당이 좋아?” 하고 내가 물었다. 형은 “성당이 집처럼 편해” 하고 대답했다. 오랫동안 교리교사를 했던 형이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형이 스스로 살아 있음, 그 존재감을 느꼈던 곳은 교회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형의 집에 갔을 때, 거실 정면에 걸려 있던 그림은 ‘가시관을 쓰고 피흘리며 고통받는 예수’의 초상이었다. 추측이란 항상 위험한 것이지만, 그 초상화의 예수처럼 책임과 고통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쑥 고통을 강박하는 듯한 신앙이 원망스럽고, 화가 치밀어 그 그림을 당장 벽에서 떼어냈다.

인간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빌미삼아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복음,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신앙, 서글프게 우는 것보다 빛나게 웃는 데 익숙한 종교가 절실하다. 형이 죽고 나서 내 마음을 계속 어둡게 만든 것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프다는 소리조차 못하고 끙끙거리며 견디던 형의 모습이었다. 형이 편안한 얼굴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을 돌아갔다면, 때로 죽음조차 축복처럼 여겨졌을 텐데 말이다.

영안실에서 성당 연령회 분들이 형의 시신을 염습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곱게 수의를 입은 형의 시신은 마치 누에고치 같았다. 묵은 세상에서 얻은 목숨을 털어내고, 저승에선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면 좋겠다. 더이상 고통이 없고, 눈에서 눈물을 훔칠 일이 없는 세상에서 다복하게 웃는 모습으로 영영세세(永永世世) 살았으면 좋겠다.

생전에 마음을 가까이 두고 살았던 장인 어른의 영혼이 그 눈부신 길목에서 형의 영혼을 마중 나와 주셨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도 형의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 이승에서 겪었던 옛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담소할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먼저 이승을 떠난 사람들 때문에 우리들의 저승길도 외롭지 않을 거라는 위안을 품는다.


사진출처=pixabay.com

 

형의 시신은 김해시립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바수어져 나왔다. 이제 그의 눈빛도 꼭 다문 입술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형은 지난 20여 년 동안 객지에서 살았다. 공부를 마치고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로 부산에서 결혼하여 경남 김해에서 줄곧 살면서, 직장과 성당 사이를 오가며 ‘참으로’ 부지런하게 살았다. 가족들은 모두 서울과 인천에서 살고 있었고, 형은 명절에나 겨우 인천 어머니 집에 다녀갔는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불어 살고 싶다고 하셨던 둘째 아들이었다.

형제들과 처자식은 또 다른 것일까? 형은 김해에 사는 처가식구들과 피붙이보다 더 가깝게 지냈지만, 마음 한쪽에선 고향에 사는 형제 자매들의 육정(肉情) 또한 그리워했던 것 같다. 객지생활이 주는 긴장을 풀어주고, 있는 그대로도 관계 맺음이 가능한 사람들이 혈육인 탓이다. 형은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에서, 전주에서, 인천에서 보냈던 2년 동안의 투병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던 20년의 거리를 좁혀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통증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다가도 누나들이 병문안을 오면 얼굴빛이 밝아지곤 했던 형은, 우리 모두가 결국 얼마나 사랑을 바라는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형의 시신이 화장터의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 형수님이 던진 마지막 말 역시 “여보, 사랑해…”였다. 우린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형의 흔적은 경주 인근의 가족묘지에 묻혔다. 생전에 형과 깊은 교감을 나누던 장인 어른의 묘 가까이 형을 모시던 날은 궂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삼우제를 지내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 형은 죽어서도 자신의 음성을 가족들에게 전달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처가 식구들의 극진한 정을 느끼면서, 그래도 형이 충분한 사랑 속에 있었음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형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김해 식구들과 인천 식구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공간적 거리를 정서적으로 묶어주고, 남은 날들을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형은 이승을 떠났고, 남은 것은 사랑뿐이었다.

무주 집에 돌아오니 쨍하게 파란 하늘 아래 사방이 흰빛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동안 두 차례나 산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고생한 모양이다. 처마에는 한 팔 길이는 됨직한 고드름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장작을 집어다 아궁이에 불을 땐다. 내 몸에 온기를 더하기 위함이다. 형에 대한 응답으로 그 온기가 쓰여진다면 좋겠다. 그날 밤부터 우리 식구들은 촛불을 당기고 연도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형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 영원한 빛이 그에게 비추기를 바라면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