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48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9)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

ㆍ위험한 사랑 “사내란 제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는 힘이 나지 않는 법이다.” 아사다 지로의 를 홀린 듯 읽었습니다. 는 달빛 아래 오솔길을 뚜벅뚜벅 걸을 줄 아는, 사무라이 세상의 끄트머리를 살았던 한 하급무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노를 삭일 줄 알고, 단장(斷腸)의 심정을 알고, 나라와 맞바꾸어도 절대 죽게 해서는 안되는 목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죽을 자리를 찾아갈 줄 아는 사내의 이야기가 찡했습니다. 사내가 없습니다, 이 시대엔. 왜 사내가 없는 거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내는 루벤스의 저 그림(‘삼손과 델릴라’, 1609~1610년경, 목판에 유채, 185×205㎝, 내셔널 갤러리, 런던) 속의 사내, 삼손입니다. 사내다운 사내였지요, 삼손은. 그는 싸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사자를 찢..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8) 조르주 로슈 그로스 '꽃밭의 기사'

ㆍ무드는 감정을 방해한다 의 작가 정인경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등에 지고 태어난다고.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신이 풀어낸 이야기를 돌아보면 살아온 날들이 정말 기적이지요? 살아온 날들의 기적 속에서 살아갈 날들의 기적을 믿으며 두려움 없이 뚜벅뚜벅 걸어갈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삶의 주인공이 아닐까요?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저 그림은 살아온 날들이 기적이었던 삶의 주인공, 바로 파르시팔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이 ‘꽃밭의 기사’라고 되어 있는데, 신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쉽게 친숙해질 그림입니다. 저 그림은 남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 파르시팔 신화를 그린 것입니다. 사내랄 수 있는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칭찬을 듣고 싶은 여자..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6)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는 카미유’

ㆍ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리다 ‘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면서 고흐가 말했습니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해.” 아마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별들이 가까웠나 봅니다. 이번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눈여겨보게 된 그림 중에는 직접적으로 그 죽음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모네의 그림, ‘임종을 맞는 카미유’입니다. 꿈처럼 모호하고 환상처럼 아련하기만 한 저 그림은 제목처럼 임종의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는 저 여인 카미유는 임종의 순간에 서른두살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리도 젊은 몸에 들이닥친 혹독한 세파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직..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5) 고흐'별이 빛나는 밤'

ㆍ번뇌는 별빛이라 마음 안에 번민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또 번민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번민을 모르고는 인간이 될 수 없고, 번민에 사로잡혀서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거지요. 번민이 자유롭게 흘러 빛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길을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처럼 세파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고백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진짜 번뇌는 별빛, 아닌가요?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는 붓 터치로, 마음을 다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은 역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있으면 분명히 느낍니다. 고흐에게 그림은 길이고, 혈관이고, 생..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4) 모로의 ‘환영’

ㆍ보고 있나요, 당신을 위한 이 춤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사는 거친 남자, 그가 저 환상 속의 그대, 세례요한입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가지고 싶은 것도 없는 그는 거칠 것 없는 야성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를 죽인 헤롯왕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권력자였다면, 그에게 죽은 요한은 광야의 바람을 호흡하는 당당한 사내였습니다. 그런 사내를 죽게 한 여인이 저기 저 춤추는 팜므파탈, 살로메입니다. 모로가 공을 들인 살로메를 보십시오. 춤을 추고 있는 그녀는 옷을 입은 걸까요? 보석을 걸친 걸까요? 저렇게 세련되고 섹시하게 꾸민 걸 보면 그녀 스스로도 도발을 즐기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녀는 누구에게 팜므파탈인가요? 원래 그녀의 춤은 헤롯왕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녀와 그녀의 어미는 헤롯왕의 마음을 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3)이 시대의 오르페우스, 임재범

ㆍ귀스타브 모로의 ‘오르페우스’ 유디트의 손에 들려있었던 남자의 목은 참담하기만 했는데, 이름 모를 저 여인이 안고 있는 남자의 목은 침묵 속에서 고요하지요?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거 같습니다. 몸의 일부처럼 늘 지니고 다니며 연주했던 리라 속에 안치되어 있는 저 남자, 그 유명한 오르페우스입니다. 이상하지요? 나는 왜 ‘너를 위해’를 부르고, ‘여러분’을 부르는 임재범씨를 이 시대의 오르페우스라 느끼고 있는 걸까요? 오르페우스가 누군가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비탄에 잠겨 비탄의 노래만 부르다 마침내 슬픔 자체가 된 남자 아닙니까? 유리디케 없는 세상엔 슬픔밖에 없다는 듯 그는 슬픔의 노래 속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너를 위해’를 부르는 임재범씨를...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2) 티치아노의 ‘유디트’

ㆍ유디트, 팜므파탈적 에너지 홀로페르네스의 죽음은 행복한 것일까요, 불행한 것일까요? 죽기 전 그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저토록 아름답고 슬기로운 여인이 다시 있을까, 하고. 그렇습니다.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그토록 매혹당한 여인이 저 여인 유디트고, 그녀의 손이 들고 있는 얼굴이 조금 전까지 그녀를 찬탄했던 바로 그 남자 홀로페르네스입니다. 오스스, 소름이 돋지요? 사랑을 나눈 남자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침착한 여인의 모습 때문에 돋는 소름의 정체는 두려움일까요, 혐오감일까요, 아니면 공감일까요?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파탈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브, 데릴라, 메데이아, 살로메 같은 여인들이지요. 유디트는 그 팜므파탈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1)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

ㆍ네 운명을 사랑하라! 저기 저, 잠든 여인 뒤로 멀리 배 한 척이 떠나는 게 보이지요? 저렇게 고요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평화로운 순간에도 배가 떠나듯 사랑이 가고 행운이 갑니다. 그러나 또 발치에 앉아 여인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는 두 마리의 표범들처럼 사랑이 오고 행운이 걸어들어 올 것입니다. 강제할 수도 없고 길들일 수도 없는 디오니소스의 표범이 스스로 찾아온 것을 보면 저 여인이 운명적 인물인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잠들어 있는 젊은 여인은 아리아드네고, 떠나가는 배는 그녀가 사랑한 영웅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가 잠든 틈을 타 도망가는 거고,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여인이라 하기엔 자태부터도 너무나 매혹적이지요? 그..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0)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

ㆍ복수하는 마녀의 신화적 원형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짐이 되고 체증이 되니까요.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을 요구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가겠다고 하면 반드시 사랑의 빚을 청산하라고 비수를 들이댈 테니까요. 그러나 또 그 위험한 사랑을 모르고 복수의 드라마가 난무하는 인간사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수하는 마녀의 신화적 원형, 메데이아를 아십니까? 내 남자의 여자를 죽이고, 마침내 자신의 두 아들까지 직접 살해하는 그 여자 메데이아! 어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저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입니다. 메데이아는 워터하우스도 그렸고, 모로도 그렸고, 샌디스도 그렸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은 바로 저 그림입니다. 저 그림에는 사랑에 올인한 여인의 ‘복수’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19)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ㆍ무상의 표상, 백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악착 같은 세상 견디기 힘들 거라는 마음에 힘이 붙을 때는 어떡할까요? 그런 마음이 찾아들 때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