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위험한 사랑
“사내란 제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는 힘이 나지 않는 법이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홀린 듯 읽었습니다. <칼에 지다>는 달빛 아래 오솔길을 뚜벅뚜벅 걸을 줄 아는, 사무라이 세상의 끄트머리를 살았던 한 하급무사의 이야기입니다. 분노를 삭일 줄 알고, 단장(斷腸)의 심정을 알고, 나라와 맞바꾸어도 절대 죽게 해서는 안되는 목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죽을 자리를 찾아갈 줄 아는 사내의 이야기가 찡했습니다. 사내가 없습니다, 이 시대엔. 왜 사내가 없는 거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내는 루벤스의 저 그림(‘삼손과 델릴라’, 1609~1610년경, 목판에 유채, 185×205㎝, 내셔널 갤러리, 런던) 속의 사내, 삼손입니다. 사내다운 사내였지요, 삼손은. 그는 싸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사자를 찢어 죽인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각할 줄 알고 또, 툭 털어낼 줄 알았습니다.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의 상황은 사랑의 함정에 빠져버린 삼손입니다. 저 근육질의 잘생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든 요염한 여인은 팜므파탈의 계보에 있는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이방여자 델릴라를 사랑했고 델릴라 때문에 힘이 빠졌습니다.
페터 파울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1609~1610,나무판에 유채,185×205㎝,내셔널 갤러리,런던
삼손과 델릴라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은 삼손은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를 만나 자기 힘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때는 그저 힘을 잃은 삼손이 안타까워서 왜 그랬느냐고, 왜 이방처녀와 사랑에 빠져 여호와를 진노케 했느냐고 삼손에게 죄를 묻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삼손이 좋습니다. 그는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방인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위험한 사랑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백한 영웅이었습니다. 그 삼손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머리카락이지요? 삼손은 나면서부터 신께 바쳐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잘라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은 그의 약점이기도 한 거였습니다. 사실 영웅들의 힘의 원천은 모두 그의 약점이기도 하지요?
아킬레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모세도 모두 약점이 있었습니다. 영웅은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인배가 파멸이 두려워 약점 뒤에 숨는 사람이라면 영웅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자연히 파멸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남의 약점만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불행히도 삼손의 델릴라가 그랬습니다. 델릴라가 삼손을 망가뜨릴 여자인 건 삼손과 살면서 삼손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된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림 속에서 사건은 델릴라의 침실에서 벌어지고 있네요. 삼손이 델릴라의 무릎 위에서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손과 델릴라의 이야기를 잊고 아무런 편견 없이 그림 속의 남녀만을 본다면 주제는 애욕, 아닐까요? 온전히 사랑한 후 껍데기만 남은 남자와, 그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당당해진 여자! 어쩌면 루벤스는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은밀한 애욕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애욕을 평가하는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델릴라의 침실 안에 침입자가 있지요? 한 남자는 손에 가위를 들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고, 노파는 그 남자를 위해 빛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쩐지 노파의 미소가 불길하기만 한데, 문 밖에서는 삼손을 잡아가려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팔아먹는 델릴라의 아름다운 육체를 보고 있노라면 슬퍼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저 소중한 것을 저렇게 싸구려로 팔아넘길까요? 자신을 팔아먹고자 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남자는 어리석은 남자겠으나, 어리석어보지 않으면 또 어찌 지혜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오는 법이니까요. 나는 사랑의 덫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한 삼손의 자유로운 기질이 좋습니다.
마음이 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은 마음이 한바탕 놀아야 할 곳입니다. 마음 가는 곳이 위험하다고 가지 않으면 생은 안전하나 지지부진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곳, 그리하여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곳, 그곳이 마음 가는 곳입니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1) 모네'수련 연못' (0) | 2018.08.25 |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0) 고흐 '해바라기' (0) | 2018.08.25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8) 조르주 로슈 그로스 '꽃밭의 기사' (0) | 2018.08.25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6)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는 카미유’ (0) | 2018.08.25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5) 고흐'별이 빛나는 밤' (0) | 2018.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