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19)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모든 2 2018. 8. 25. 00:08

 

ㆍ무상의 표상, 백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악착 같은 세상 견디기 힘들 거라는 마음에 힘이 붙을 때는 어떡할까요? 그런 마음이 찾아들 때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시선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 그림에 사로잡히면 곧 저 그림의 정신적 힘은 해골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저 그림의 매력은 마리아의 오른손에서 옵니다.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지요? 해골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해골로 흐르고 있습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4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 박물관, 파리 


  마리아가 해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촛불에 씻긴 눈으로 내면을 응시하면서 홀연한 지혜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로 상징되는 무상(無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무상의 표상인 해골이 무섭지 않은 마음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로 정화의 의식을 올리는 영혼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자이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때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 교감의 경험이 마리아에게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을 응시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준 게 아닐까요? 그나저나 그녀는 무엇을 참회하고 있지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해 또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늘 열정이 빗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일 겁니다. 예수를 만나 깊은 사랑에 감동받은 그녀는 이제 열정이 고통이 되고 있는 그녀 같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깊은 사랑에 이르는 지혜의 향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어디에도 없으니 무상한 사랑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무상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기지요? 젊음은 왜 이리 짧고 사랑은 왜 그렇게 빠르게 가냐고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는 다릅니다. 짧은 순간에 평생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마리아는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요.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나와도 저 그림은 불교적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합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무시무시한 백골을 앞에 두고 관을 하지요? 백골이 무서운 것은 백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골은 나의 미래이고, 나는 백골의 전생입니다. 살아보면 산 게 없는 백골 같은 인생, 백골 위에 손을 얹고 기원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학벌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력일까요? 혹 무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혜인 것은 아닐까요?


  슬픔이 밀려들 때는 해골을 만지고 있는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촛불이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밝혀주면서 문제를 객관화시켜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