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0)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

모든 2 2018. 8. 25. 00:16

 

ㆍ복수하는 마녀의 신화적 원형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짐이 되고 체증이 되니까요.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을 요구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가겠다고 하면 반드시 사랑의 빚을 청산하라고 비수를 들이댈 테니까요. 그러나 또 그 위험한 사랑을 모르고 복수의 드라마가 난무하는 인간사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수하는 마녀의 신화적 원형, 메데이아를 아십니까? 내 남자의 여자를 죽이고, 마침내 자신의 두 아들까지 직접 살해하는 그 여자 메데이아! 어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저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입니다. 메데이아는 워터하우스도 그렸고, 모로도 그렸고, 샌디스도 그렸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은 바로 저 그림입니다. 저 그림에는 사랑에 올인한 여인의 ‘복수’ 너머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저 팜므파탈의 원형으로만 기억하는 메데이아가 배신이 취미고 복수가 특기인 분노의 화신만은 아닐 거라고. 

 

  메데이아는 본능이 강한 대담한 청춘이었습니다. 약초와 독초를 다루는 그녀는 신비하고도 오만한, 자신감 넘치는 여인이었습니다. 훗날 “나의 감정은 나의 이성보다 강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그 여자 메데이아가 아버지의 적(敵)인 이아손을 사랑하게 됐을 때 아버지를 배신하고 이아손을 선택하는 일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라크루아, ‘격노한 메데이아’, 1862년,

캔버스에 유채, 120×84㎝, 루브르박물관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 메데이아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황금양털을 훔쳐 이아손에게 주고, 이아손과 도망친 것입니다. 뒤쫓아 오는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사랑은 금이야, 옥이야 사랑해준 부모를 하루아침에 배반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한 모양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랑한 남자가 또 어느 날 아침에 나를 배신한다면 어떨까요?

 

  어쨌든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코린토스에 정착해서 두 아들을 낳고 십년간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문제는 황금양털을 손에 넣었어도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의 남자 이아손이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영웅에게 왕이 될 기회는 언제나 유혹적인가 보지요?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이 영웅 이아손에게 자신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 제안에 혹한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세상에, 영웅은 그런가요? 그렇게 간단한가요? 

 

  생 전부를 걸고 사랑했는데, 내 사랑으로 영웅이 된 남자가 제 잇속만 챙기고 떠나겠다고 하면 지금의 나는 잘 가라고, 떠나줘서 고맙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20대의 나라도 그랬을까요? 더구나 아직 어린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용서가 사랑의 완성이란 말을 되뇌며 축복하듯 잘 가라고 이별의 인사할 수 있을까요?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강요된 용서보다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메데이아의 행위가 정직한 거라고. 

 

  메데이아는 남편의 여자를 죽입니다. 물론 그것은 복수입니다. 복수하기 위해선 자기 인생도 풍비박산 나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녀는 복수하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왼손에 비수를 들었어도 무릎동작이나 오른손의 동작을 보면 오히려 아이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을 보십시오. 분노의 표정이 아닙니다. 뒤돌아보고 있는 그녀는 지금 뭔가에 쫓기고 있지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말합니다.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아이들을 적들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 그 아이들을 직접 낳은 메데이아 자신이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저 그림은 바로 그 ‘메데이아’의 상황을 그린 것입니다. 메데이아가 아이들의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차가운 죽음입니다. 적들의 손에서 아이들이 차갑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스스로 아이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어미인 것입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습니다. 그 소름이 메데이아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공감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나는 메데이아의 비극적 운명을 싫어하면서도 그 운명을 감당하는 그녀의 태도는 사랑하고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