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리 울지
운명이라는 게 있지요? 우연하고 무심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좋든 싫든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 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런 놈! 어쩔 수 없는 사태에 대해 무기력하기만 했던 젊은 날엔 그런 운명이란 놈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내가 절대로 좋아할 수 없었던 작품이 저 작품, 뭉크의 ‘절규’였습니다. 아마도 나는 그 절규의 느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한 것이겠지요.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귀를 막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자가 끔찍했습니다. ‘어휴, 저런 그림은 공짜로 줘도 내 공간엔 걸어놓을 수 없겠구나. 차라리 울지, 서럽게 울어버리지, 그랬더라면 희망의 불씨라도 보았을 텐데…. 뭉크는 왜 저런 그림을 그린 거야?’ 나는 울지도 못하는 남자가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템페라화,
83.5×66㎝, 국립미술관, 오슬로
무섭고 놀라 언어도 잊은 것 같지요, 저 남자는. 저 해골바가지 같은 남자로 인해 실상은 매혹적으로 빛났을 오렌지 빛 하늘은 불안하기만 한 핏빛으로 흐르고, 분명히 아름다웠을 석양의 바다는 검푸른 괴물이 되어 남자를 덮칠 것만 같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겠지만, 세상에 대한 해석은 ‘나’의 그림자니까요. 뭉크는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산책을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친구들은 산책을 계속했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절규를 들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자연의 절규를 혼자서만 들은 것입니다, 뭉크는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았나 봅니다. 그런 것들이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도 그럴 것이 뭉크는 다섯 살 때 세상의 중심인 엄마를 잃고, 열네 살 때는 엄마 대신 정을 붙이고 살았던 한 살 연상의 누이를 잃어버립니다. 젊은 엄마도,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도, 모두 결핵이었습니다.
어리고 여린 어린이가,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앗아가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소화되지 않은 운명은 공포가 되어 온 세포를 물들이고, 온 세상을 물들입니다. 그러니 ‘나’는 절규하고, 세상은 절규가 됩니다. 뭉크의 그림이 무섭고 어둡고 불안한 운명을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림을 알게 되면서 뭉크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무거운 운명을 화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자신의 운명과 대면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는 고백하게 됩니다.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거라고. 긍정할 수 있게만 된다면 잔인했던 만큼 아름다운 내면의 눈을 선물하는 놈이 또 운명이라는 놈 아닙니까? 뭉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는 선과 색은 모두 내면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나는 기억에 의존합니다. 다른 것을 더하지는 않습니다.”
기억이란 묘합니다. 사실에 의존하나 사실이 아니고, 지나간 것이나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기억은 끊임없이 되돌아와 현재에 사무쳐 현재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내 기억 속에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야기하지 못하는 일들, 부끄럽기만 한 사태들, 무섭고 두려워 잊고 싶기만 한 감정들, 그런 것들을 뭉크의 그림처럼 정직하게 꺼내보십시오. 그 기억들이 아프지 않고 싫지 않을 때까지. 그래야 맨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뭉크의 ‘절규’가 50가지에 이르는 버전이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경험할 것입니다. 지나온 것이지만 변하는 것, 생로병사가 있는 살아있는 기억의 신비를!
나이가 드니 알겠습니다. 내가 두려워했던 그 운명은 인생이 내게 부여한 과제였음을. 이제 나는 저 그림이 싫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나도 내 속의 불안과 화해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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